어느 마을에 지혜로운 노인이 살고 있었다. 키가 큰 여행객이 나타나 마을이 살기에 어떤지 확인하려는 듯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에게 다가와 “이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여행객은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협력하지 않고 살기에 좋지 않은 마을입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때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마을도 당신이 사는 마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잠시 후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남자가 노인을 향해 물었다. “이 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입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곳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그는 말했다.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가깝게 지냅니다. 서로 도와주고 어디를 가나 서로 따뜻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자 노인은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이 마을과 아주 비슷하군요. 이 마을도 사람들이 서로 정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이좋게 살고 있습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 순간 손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왜 첫째 사람이 물었을 때는 마을이 살기에 아주 고약한 곳이라고 하시더니 저 사람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노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햇다.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 마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곳을 만들기도 하지” 행복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타겟 (A. W. Target)의 쓴 단편소설 ‘창(Window)’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작은 병실에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와 디스크 환자가 입원하였다. 디스크 환자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늘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폐암 환자의 얼굴에 기쁨이 있는 까닭은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그의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다.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기로 마음먹고 아름다운 호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며 살았던 것이다. 편안과 평안은 차이가 있다.

편안은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의 차원이다.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생활이 편안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이 편안한 것 보다는 영혼이 평안해야 행복한 것이 아닐까. 명절이면 행복이 깨지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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