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福)을 짓는다는 말이나 덕(德)을 쌓는다는 말은 다 같다. 남에게 복을 주면 그 복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고 덕 역시 그렇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복이나 도가나 유가에서 말하는 덕은 매양 같다. 왜 같은가? 다 남을 이롭게 하는 까닭이다.

내가 나를 이롭게 하면 불의에 빠지기 쉽지만 남을 이롭게 하면 그것은 의로 통한다. 그래서 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리지변(義利之辨)에서 이를 완전히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만을 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려는 이만을 부정할 뿐이다.

부덕한 짓을 범한 다음 덕을 앞세워 용서나 이해를 비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한 다음 불민하고 부덕해서 일이 그렇게 되었노라고 사과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덕은 두 번에 걸쳐 상처를 입는다.

덕을 어겨 잘못을 범한 다음 덕을 팔아서 그 잘못을 넘겨 버리려는 심사를 부리는 까닭이다. 덕을 짓는 사람은 마음이 성실하다. 성실한 마음은 허튼짓이나 어긋나는 짓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설령 과실을 범했다 할지라도 둘러쳐서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진실하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믿음을 나누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덕을 높이는 것은 성실한 마음과 믿음을 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딴 생각을 품고 의심을 하기 좋아하면 마음은 총명을 잃어버리고 혹하게 된다. 깨우치지 못해 어긋난 짓을 행하는 사람은 혹을 떼려다 혹을 달게 되는 낭패를 당한다.

그러한 낭패는 부덕이 가져다주는 뒤탈이요 벌이다. 그렇게 벌을 받아 감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낯가죽이 두꺼워 뉘우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철면피요 덕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않는다. 자기를 부끄러워할 줄 알고 뉘우칠 줄을 알면 이미 덕은 그의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옳은 것이면 감출 것 없고 선한 것이면 숨길 것 없다. 옳지 않은 것 인줄 알면서도 그 짓을 범하고 악한 것 인줄 알면서 그렇게 하면 죄는 이미 그 씨앗을 뿌리고 터를 잡는다.

법을 어기는 것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도둑질이나 강간 살인을 하는 도둑들이 큰 죄를 범하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도 큰 죄를 범하는 원흉들이다. 높은 자리나 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온 나라가 탈을 앓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눈이 밝아야 하고 귀가 밝아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곁눈질을 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눈길을 맞추기 쉽고 큰 위치에 있는 자가 귀가 얇으면 그 귀에다 소곤거리며 이득을 챙기는 무리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막막한 것은 없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왜 밝은 대낮에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밤에 귀를 맞대고 눈길을 서로 훔쳐야 하는가? 숨길 것이 많고 감출 것이 많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흥정을 하고 수를 부려서 될 수 있으면 이권을 많이 독차지하려고 벼르면 벼를수록 끼리끼리 패를 만들어 짜야한다.

이익을 위하여 서로 야합하는 것이다. 야합을 하면 반드시 이익을 보는 쪽과 손해를 보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싸움이 일어나거나 일어날 싸움을 어떻게 대처하여 풀어갈 것인가를 숙의하게 된다.

말하자면 은밀한 수순을 미리 쳐 놓자고 입을 맞춘다. 여기서 담합이 이루어진다. 총명한 인간이 되려면 야합하거나 담합하지 말아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을 보라. 번번이 뒤끝이 좋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총명하지 못한 탓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야합이나 담합을 무서워했더라면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다음에도 원성을 사지 않았을 터이다. 총명이란 무엇인가? 죄의 예방약을 짓는 밝은 귀요, 맑은 눈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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