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삭빠르고 싹싹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마음속에 쉴 틈이 없다. 무슨 일이든 만들어 꾸며 보려는 욕심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두질 못한다. 어수선하게 일을 벌여놓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밤낮으로 쫓기면서 자신을 돌이켜 볼 줄을 모른다. 이러한 사람은 영악할 수는 있어도 어질 수는 없다.

어진 사람은 마음 씀씀이도 느리고 둔해 보인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듯이 사람에 대해 신중하고 삶에 대해도 엄숙하고 느긋하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지만 근엄해 보인다. 선한마음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선(善)한 마음으로 살면 그것이 곧 예(禮)인 셈이다. 선하다는 것은 인의(仁義)를 현실화하는 마음이요, 행동이다. 인간에게는 선악(善惡)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존재이다. 악(惡)이란 불인(不仁)이며 불의(不義)이다. 불인을 범하려는 나를 이겨내고 불의를 탐하려는 나를 이겨내야 느끼는 것도 어질고 생각하는 것도 어질 것이다.

악한 마음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지고 옳은 마음은 옳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헤아린다면 나를 이겨서 예(禮)로 돌아간다는 것은 짚을 수가 있다.

약삭 빠른 현대인은 자신을 이길 생각은 않고 남을 이길 생각만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벗을 잃었고 이해상관으로 얽힌 동료만 있을 뿐 항상 서로 경계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이겨낼 생각만 골똘이 한다.

극기복례를 잊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란 속담은 막돼먹은 인간을 비유해 준다. 그러한 인간을 건달이라고도 부른다. 건달기가 있는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건달은 남들로부터 신용을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얌전을 떨던 강아지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은 겉으로는 얌전을 떨면서 속으로는 응큼한 짓을 하는 인간을 비유해 준다. 새침기가 있는 인간은 그를 믿는 사람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는 허망한 자이다.

말하자면 뒤로 호박씨를 까는 인간형이 새침데기일 것이다. 그래서 새침데기는 남들로부터 뒷말을 듣는다. 그러나 건달은 깡패 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건달의 마음이 악하거나 모질지 못해 사람을 가볍게 대하고 삶을 건성으로 적당히 살아갈 뿐 흉악한 도둑이나 무지막지한 무례한은 아니다. 다만 경솔하고 까불고 무엇이든 얕보는 약점이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뿐이다.  다만 자기에게 손해 갈 짓은 아예 하지 않을 뿐이다.

새침데기는 칭찬을 받으면 헤헤거리고 비난을 받으면 꽁해져 입을 다물고 토라질 뿐이다. 그러니 건달은 대놓고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고 새침데기는 자기를 지나치게 챙겨서 실속을 좀 차리려 할 뿐이다.

마음 편히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한탄할 때가 많다. 이런 한탄은 이 세상에 건달꾼들이 우글거린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성급하고 조급해 조금만 싫어도 삿대질을 하고 살기를 품다가도 조금만 기분이 좋으면 온 세상이 다 풀린 것처럼 싱겁게 몸짓을 떨면서 헤헤거리는 꼴들을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건달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으려고 한다.

믿을 사람이 없는 세상이라고 자조할 때가 많다. 이러한 자조는 만나는 사람마다 새침기가 있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세상임을 일러준다. 나도 새침꾼이고 너도 새침꾼이라면 모두가 제 실속만 차리니 남을 돕고 이해해 주는 여유는 없어져 버린다. 개인중심이니 이기주의니 하는 것은 인간들이 모두 새침데기로 돌변해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돌변한 인간에게 건달기마저 붙어서 세상을 얕보고 함부로 삶을 소모하면서 아무런 미련 없이 막가는 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세상은 건달들의 수용소도 아니고 새침데기의 소굴이 돼서도 안 된다. 나하고 너하고 서로 믿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살아야 사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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