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를 앞 둔 가을 들녘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벼들로 황금 물결을 이룬다. 이 때쯤이면 예전의 시골 아이들은 참새들과의 전쟁을 위해 깡통을 두드리며, 숯 검댕으로 눈썹을 그린 허수아비가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터트리던 시절이 있었다.

농경시대부터 사용한 숯

최근에는 공해대책용 흡착제 뿐만 아니라 아궁이 숯의 제조 때 발생하는 적외선을 이용한 의료기기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실생활에 숯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신석기 시대가 지난 농경사회 부터이다.

숯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 적합하게 개량되었다. 농경사회 때는 소탄(燒彈, 뜬숯) 정도의 목탄이었으며, 철기시대에 와서는 철을 녹일 수 있는 야금용의 좋은 숯이 다량으로 필요해 복소법(伏燒法)이 개발돼 농업기구나 무기 등을 생산하는데 이용되었다.

고려 말기 청주에서 금속활자를 만들 적에는 철을 녹일 수 있는 1000도 이상을 올릴 수 있는 숯을 이용한 목탄이나 백탄과 같은 고도의 다양한 기술을 토대로 주조술을 개발하였다.

숯을 이용한 우리 나라의 온돌은 난방과 동시에 취사도 함께 할 수 있는 복합적인 난방방식을 고안해 남은 땔감을 뜬 숯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화롯불을 지피거나 다리미질을 할 때 이용하였다.

또한 숯의 재는 비료로 시용하였으며 밥을 지을 때 걸었던 무쇠 솥 밑의 검댕이를 몽당 숟가락으로 굵어 사람이나 짐승이 배탈이 났을 때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소나무 검댕을 아교와 섞어 목판 인쇄에 반드시 필요한 송연먹(松烟墨)을 만들었던 것이다. 솥에 송연먹물을 묻혀서 목판에 골고루 칠한 다음 종이를 가볍게 얹고 머리카락이나 말총을 밀랍으로 뭉친 문지르개로 가볍게 문지르면 종이에 글씨가 찍혔다.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만주지역과 우리 나라의 서북부 지역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숯의 활용은 더욱 실용화 된다. 당시의 사람들은 섭씨 1천도가 넘는 온도에서 구리와 주석, 납 등을 넣고 녹여 청동쇳물을 만든 뒤 이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단검, 도끼, 거울 등의 청동제품을 생산하고 특히 가야인들은 쇳덩어리 철정(철정·鐵鋌)을 만들어 화폐로도 사용했다.

이러한 철기문화의 발달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일반서민 들도 숯을 사용해 밥을 짓고 온돌을 사용할 정도로 숯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세공술이 극치를 이룬 신라 금관을 만들 때 숯을 연료로 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제련할 때 코크스 등 유연탄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연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숯을 사용해 철을 다루는 기술은 철불(鐵佛) 및 동종(銅鐘)의 제작기술로 발전된다.

고려시대에서는 이러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화폐와 금속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다양한 활자를 개발하게 된다.

철기시대 이후로 숯의 중요성이 더해 제철용 숯을 만들기 위한 숯가마가 따로 만들어 졌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주조기술에 영향을 미치다

청주는 금속활자 인쇄의 본 고장임에도 아직까지 금속활자를 비롯해 주자소가 되었던 유구(遺構)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다.

최근 청주시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고장임을 알리고, 금속활자 주조 기술을 전파하기 위한 금속활자 주조 전수관을 청주고인쇄박물관 부지에 2013년 4월 경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인 임인호 금속활자장이 금속활자의 기능 보존과 전승을 하는 한편 체험 학습장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향후 이 전수관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금속활자 주조기술의 실험을 통한 과학적 입증을 해 자랑스러운 고인쇄문화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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