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이름을 지닌 피리였다. 그 피리를 불게 되면 한우우청(旱雨雨晴)이 된다는 것이다. 즉 가뭄(旱)에는 비(雨)를 내려주고 비가 오래 끌어 장마가 되면 날씨를 개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피리는 분명 중용(中庸)의 덕(德)을 소리로 내는 보물인 셈이다. 중용이란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은 같다는 것을 헤아리게 한다. 즉 알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수를 지킬 줄 알면 일단 중용의 문을 연 셈이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덕을 만나게 된다. 가물면 초목(草木)이 타고 장마가 지면 초목은 녹는다. 타도 목숨은 못 견디고 녹아도 목숨은 남아나질 못한다. 가뭄은 물이 없어서 탈이고 장마는 물이 많아서 탈이다. 목숨을 못 견디게 하는 가뭄이나 장마는 모두 자연이 보여주는 부덕의 한 모습이다.

마음이 바짝 말라 버린 사람을 보면 가뭄의 모래벌을 보는 것 같다. 반대로 지나치게 비굴한 사람을 보면 장마로 진탕이 돼버린 시궁창을 보는 것 같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사람이라고 하면 단번에 무서운 사람으로 느껴지고 굶주린 개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진다.

이러한 탈은 모두 중용을 잃어버려서 비롯된다. 가물면 비를 바라고 장마가 지면 맑은 날씨를 바란다. 이와 같은 바람을 헤아린다면 중용의 덕이 얼마나 사람과 삶에 귀중한가를 알 만하다.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불면 세상의 탈이 없어진다고 신라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따지고 본다면 중용의 덕을 소망했음을 말해주는 셈이다. 그러한 소망이 한우우청이란 구절에서 나타난다.

만파식적의 한우우청을 생각하면 중용의 덕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같고 중용의 덕을 생각하면 자공이 공자께 자장(子張)과 자하(子夏)를 묻는 대목이 연상된다. 자공이 둘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하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하나는 넘치고 하나는 쳐져서 탈이라고 응해줬다. 지나친 것과 못 미치는 것은 서로 다르냐고 자공이 묻자 다를 바가 없다고 공자께서 잘라 말해줬다.

가뭄에 계속돼 물이 말라 목숨이 해롭게 되는 것이나 장마가 계속돼 물이 넘쳐 목숨이 해롭게 되는 것이나 그 결과를 보면 같다. 사람들이 마음 씀씀이를 가뭄처럼 한다거나 장마처럼 하게 되면 그 탈은 결국 다를 바가 없다.

알맞음을 아는 마음은 몸 둘바를 알아서 발을 뻗을 줄도 알고 오므릴 줄도 안다. 공자의 제자들인 자장(子張)은 어디서나 발을 뻗자고 떼를 썼던 모양이고 자하(子夏)는 발을 오므리고 꽁무니를 뺏던 모양이다. 언제나 자장이나 자하 같은 무리들 탓으로 세상은 살벌해지기도 하고 구렁이 담 넘듯이 감추고 숨기면서 넘어가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한다.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한 부덕은 없다. 지나친 것과 모자란 것은 같다. 지나친 것도 모자람도 병이다. 중용이야 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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