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참 놀랍다. 며칠 전까지 태풍이 불고 집중 호우로 온 국민을 잔뜩 긴장하게 하더니 ‘백로’라는 절기가 지나자 바로 청명한 하늘이 나타났다. 오늘 새벽에는 자다가 한기를 느껴 이불까지 찾았으니 조상님께서 붙여준 ‘백로’라는 이름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지난 주 진천 장에 나가보니 벌써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밤과 누런 늙은 호박들이 장터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구경하다 말고 하도 밤이 실해 보여 “밤이 맛있어 보이네요. 한 개 먹어봐도 될까요?”하니 좌판을 벌리신 노인장이 웃으시며 “선산에 심은 밤나무에서 딴 것입니다. 맛이 참 좋지요”하시며 한 주먹을 주신다.

농촌인심, 가을인심이 벌써 장터에 가득하다. 나는 즉석에서 밤을 까서는 ‘오도독, 오도독’ 씹기 시작했다. 속껍질 때문에 좀 떫었지만 하얀 속살의 아삭이는 맛은 일품이었다.

“아, 바로 이 맛이야! 가을의 참맛!”

봄부터 교회 ‘찬양대 여름 수련회’ 계획을 세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움직여야 하니 일정 잡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또 어렵게 일정을 세우면 교회의 다른 일정과 겹쳐서 다시 연기하기를 몇 번. 9월 초 간신히 진천에서 1박2일로 수련회를 실시했다.

갇혀진 공간에서 자연의 열린 공간으로 나오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하기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어린양이니 뛰고 재잘거림이 당연하다고 보시겠지만….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행과 함께 버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부득이 개인차량을 이용해 수련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혹시 나와 비슷한 사정으로 버스로 이동하지 못한 분이 있을까 해 총무께 전화하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일로 고민 중에 있었는데. 세분이 있으니 함께 오시면 고맙겠습니다”하며 기뻐했다.

약속 장소에 가니 미모의 대원 세분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진천이야 나의 일터가 있는 곳이니 웬만한 길은 내 눈이 바로 지도책이요, 곳곳에 담겨 있는 문화재며 전설이야기는 내 입이 바로 문화해설자였다. ‘농다리’며 ‘생거진천’에 대한 이야기가 한 참 무르익을 때면 여성 특유의 맞장구와 환호로 인해 나는 어느 사이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가 돼버렸다. 차 창문으로 들어오던 시원한 바람이 이젠 기온이 내려가 약간의 한기를 느끼는 것 같아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CD를 켜니 첼로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이 수확을 앞둔 가을의 들녘과 조화를 이루며 차안을 서서히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밖을 보세요. 무서운 태풍들을 모두 잘 견디고 서서히 황금빛을 띠기 시작하는 들녘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농부들의 땀 냄새도 맡아 보시고요. 저는 가끔 저 들녘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저도 잘 모르지만.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 내가 더 이상의 설명을 했다면 분명 사족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좁은 차안이었지만 그 속에서 이 가을의 풍요로움과 평화로움 그리고 첼로선율의 감미로움까지 흠뻑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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