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의 광기와 어리석음이 빚어 낸 것으로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으로 인해 그릇된 오판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피해를 준다. 군사력과 전쟁은 인류역사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어서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이념갈등으로 크고 작은 국지전이 일어나고 있다.

숭고한 희생이 이땅 지켜내

전쟁에는 시대적 국익에 따라 각종 비밀전략과 협약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많은 주요 세부 사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료부족, 증인 사망 등 다양한 원인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다.

근세기에 들어 우리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6·25전쟁이 발발한 지 환갑(還甲)을 넘어 62년이 됐다. 우리는 이제 6·25전쟁 참전 군인이나 전쟁 세대들이 고령화되면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머지않아 과거의 역사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필자의 가족도 6·25전쟁의 아픔을 격은 월남 이산가족이다. 선친의 고향은 지금도 임진강에서 바라보이는 경기도 장단군 연천면 지역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 이상 징후를 알아차리고 고향을 떠났다. 풍수지리를 공부한 증조부께서 강원도 황지로 피난처를 정했고, 전쟁 중에는 다시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봉화군 춘양면으로 옮겼지만 전쟁을 피하지는 못했다. 당시의 징집 대상이었던 선친과 친척들은 혈기왕성한 나이에 땅굴을 파고 움막 생활하는 동안 여자들이 그 뒷수발을 했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인민군 점령시에 징집돼 훈련소로 가는 도중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가족해체의 아픔을 안겨 줬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란 특수 상황은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과 같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의 국군에 의한 주민 가혹행위와 같은 양민피해도 부지기수로 발생했다. 특히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지리산이나 태백산에서 게릴라전으로 돌입한 시기에 지역주민들의 고충은 더욱 심했다. 낮에는 국군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인민군 잔병(빨갱이)들은 저녁이면 내려와 식량 등을 약탈해 가며 민간인들을 괴롭혔다.        

필자의 부모님이 봉화군 춘양면에 있을 적에 두 명의 인민군이 내려와 집 안을 뒤져 식량을 가져갔다. 당시 이러한 사실은 즉시 경찰이나 군부대에 신고를 했어야 하나 또 한편으로는 빨갱이들의 보복이 두려워 미처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해 두 분께서 경찰에게 끌려가 얼마나 맞았는지 국군이 치료를 해주지 않았으면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이 시기가 되면 어머님은 늘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아픔을 이야기 하신다. 

최근 충주문화사랑회에서 70세 이상 노인들이 당시에 몸소 겪었던 전쟁체험 이야기 ‘6·25사변의 참상’이 출간된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며 역사사료 발굴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전쟁의 영웅담보다도 전쟁의 참상 목격담, 피난길, 의용군으로 강제징집 실화, 빨갱이들의 만행, 인민공화국하의 폭정, 아군에 의한 피해 등 현재 전쟁을 겪은 이들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서 종북주의와 애국가 모독 등 이념논쟁으로 국가관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이러한 때에 전쟁의 참화를 있는 그대로 증언한 실화집은 잊혀져 가는 6·25 전쟁의 생생한 증언으로 후손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아야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6·25전쟁의 실상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조국 수호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들의 희생과 숭고한 나라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고도의 발전과 성장 속에 행복을 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분단된 국가의 안보현실을 직시하고 철저한 국가관으로 다시는 이 땅에 비극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며 평화적인 납북통일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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