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임금들은 자주 온천이나 냉천을 찾아 목욕치료를 했다. 세종은 1444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117일 동안 청주 초정리에 머물면서 정천(井泉) 부근에 목욕소를 설치하고 요양을 했다. 그러나 행궁이나 목욕소에 대한 사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의 일부 기록으로 그 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견고하고 가벼운 종이 대야

또 목욕소 관리에 대해 “환궁한 뒤 온정의 정청(丁廳), 동쪽과 서쪽의 침실 및 남쪽과 북쪽의 상탕은 모두 다 봉쇄하여 잠근다. 그 나머지 칸에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목욕을 하게 하되, 남쪽과 북쪽의 다음 목욕탕은 양반집안의 남녀들에게 목욕하도록 한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의 빈 땅에 있는 목욕탕에는 집을 짓고, 또 월대(月臺:섬돌) 밑에 더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도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모든 남녀들에게 다 목욕할 수 있도록 한다(세종 15년 4월 16일 기해조)”라고 했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세종은 12년 후 초정리에서 목욕 후 행궁이나 목욕소에 대한 조처가 없다. 그러나 세종이 지역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해 경비를 절감하고자 했기 때문에 목욕소는 초정 상탕 인근 동남쪽에 5∼6칸 정도의 계단을 갖춘 욕실을 설치하고 구녀산 아래 우측에 별도의 휴식소를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중에서의 목욕법과 용구, 목욕 풍습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없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자객의 침투 등 경호상 문제로 나무통을 목욕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거나 또는 나무통 속의 물을 종이 대야를 사용해 몸에 뿌리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종이 대야는 종이에 기름을 겹겹이 바른 다음 옻칠과 주칠을 해 견고하면서 가벼워 옛날 선비들의 여행용 필수품이었다.

목욕물은 온천과 냉천은 물론 일반 물을 사용할 때도 의서를 참고해 욕수에 여러 가지 건강, 미용상의 향료나 약재를 넣어 사용했다. 

그렇다면 목욕하는 시간과 욕의(浴衣)는 어떠했을까?

세조가 내의원에 지시한 내용을 보면 “온탕에서 들어가고 나오고 할 때에 바람을 맞는 일이 많기 때문에 본래 가지고 있던 병이 채 낫기 전에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며 목욕을 지나치게 하면 지치고 좀 부족하게 하면 효력이 없으니 기력에 맞게 할 것이며 남이 어떻게 하라고 시킬 수는 없다. 목욕은 늦봄 초기(3월 초)에 해가 높이 떠오르고 날씨가 바람기가 없을 때에 배는 고프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게 알맞도록 하되 약간 양에 차지 않게 할지언정 지나치게 먹지 말아야 한다. 온탕에서 나올 때는 먼저 홑옷을 따뜻하게 해 뒀다가 나오자마자 바람이 들지 않게 등에 걸치며 바로 마른 옷을 입되 홑옷, 겹옷이나 솜옷을 알맞게 조절하여 입는다. 그 다음 반드시 더운 죽을 마시거나 술을 먹어 땀을 내도록 한다. 물 속에 있울 때는 찬물을 먹어도 괜찮다(세조 10년 4월 16일 무술조)”라 해 목욕시기와 시간, 그리고 체온 유지법을 말해주고 있다.

목욕할때 투피스 형태의 옷 입어

조선시대는 항상 어느 곳에서나 의관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 벌거벗은 상태로 목욕하기를 꺼렸다. 특히 존귀한 임금님은 목욕할 때에 명의(明衣)라는 상의와 상(裳)이라는 아래옷을 입고 유모나 보모상궁이 목욕을 도왔다. 궁중에서 입는 욕의는 서양의 목욕가운과 같은 용도였으나 목욕 후에 입는 것이 아니라 목욕하면서 입는 옷으로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윗옷과 발끝까지 내려오는 백색에 투피스 형태여서 다소 불편했다.

지난 주말 9일과 10일 초정리 일대에서 제6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가 열렸다. 세종대왕의 어가 행차와 함께 목욕장면도 재연돼 볼거리가 많았지만 우리의 전통 목욕법을 잘 접목해 새로운 상품으로 개발했으면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