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종은 즉위 26년(1444)에 한글창제 마무리 작업과 요양치료를 위해 청주 초수리 약수터에 두번에 걸쳐 행차(行次)해 117일간 초수행궁에서 머무르셨다. 그런데 당시 초수행궁터가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에 대해서는 유구(遺構)나 정확한 사료가 없어 초정 원탕 부근과, 자연부락인 주왕이 마을 가능성 등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불분명한 초정행궁터

순조 34년(1834)에 이규경이 쓴 ‘상당초정변증설(上黨椒井辨證說)’에서는 “초정리 부근에 초정원(椒井院)이 있고, 부근에 백수(柏樹:측백 또는 잣나무)가 탄 재가 조금 있는데 바로 그 밑이 원탕이다. 작은 돌을 쌓아 원탕 벽을 만들고 지름이 8척, 수심이 1장(丈:10척)이고, 물 색깔은 담벽색(연한 푸른색)으로 구슬과 같은 물거품이 땅 밑에서 위로 솟아 올랐다. 물맛은 갑자기 혀끝이 매움함이 명반(유황) 같았으며 두 곳이 샘이 있다”라고 해 초정 원탕의 위치와 재원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행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1910년대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지자료’ 충청북도편에 따르면 현재의 북이면 선암리 1구 주왕이 마을에 “옛날에 한 황제가 있었다. 이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신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 같다”고 해 초정행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지만 지역주민에 의해 구전으로 전승된 유래를 기술하면서도 정확하게 단정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기에 영천 유래와 초정행궁과 관련된 신문기사가 있어 주목 된다. 1926년 9월 28일 동아일보에 청주에 사는 최재옥(崔在玉)이 투고한 ‘향토예찬 내고장 명물’을 살펴보면 “당시 초정리는 5∼6채 정도의 초가집이 있었던 작은 촌락이었다. 그리고 두 곳의 약샘(상탕 또는 중탕으로 추정 됨)이 있다. 또한 세종이 60여 일간(이 때에는 초정 1차 행차 기록만 알았음) 머물렀으며 당시 훈민정음 학자로 호종을 했던 유회헌과 최항의 시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0년 11월 27·28일 동아일보에 청주의 구영(驅英)이 투고한 ‘내고장 名産’에는 “초정원탕의 직경은 12척, 수심 16척이다. 일호천(상탕으로 추정)의 남쪽 1정(109m) 떨어진 곳에 삼호천(하탕으로 추정)이 있는데 지하 314척의 모래층으로 최상층은 두터운 화강암 틈새에서 지상으로 용출한다”고 소개했다. 또 세종임금을 수행했던 우승지 유회헌과 집현교리 최항, 도승지 이승손의 시의 원문까지 소개했다. 행궁터에 대해서는 “왕께서 머무르실 때에는 井泉上部北方數間(민가 5∼6호로 추정 됨)의 지점에서 구릉지를 등지고 남쪽을 대하고 있다. 구녀산에 대해 우측에 휴식소를 설치하고 정천(井泉)의 동남쪽 5∼6칸을 떨어져 욕실을 설치하고 계단을 갖췄는데 임금이 오셨을 때와 경사가 조금 다를 뿐이다”고 행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휴식소와 욕실을 설치했다고 돼 있다.  

이후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이 초정리를 찾은 기행문 동아일보 1932년 8월 21일, 24일에 쓴 ‘한글순례 청주에서’에 의하면 “상중하탕이 있었고, 제일초정(상탕)의 제원을 직경 12척, 깊이 23척, 수심 5척 가량의 유출관이 박혀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 제작에 필요한 관련 서류를 휴대하고 청주 초정리에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했다”라고 해 훈민정음의 창제작업에 대해 언급했다.

발견과 복원 반드시 필요

그리고 행궁에 관해서는 “세종대왕의 유적을 찾기 어려우나 당시 제일정(원탕) 북변에 행궁의 정석(정원석)이 있어 살펴봤으나 사람이 다듬은 자취를 확인하기 어렵고 바위는 말이 없다”고 하면서 세종임금을 호종했던 유회헌, 최항, 이승손의 시 원문을 소개했다. 

이 달 9일부터 10일까지 초정리 일원에서 제6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가 열리고 있다.

세종임금이 초정을 다녀간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나 행궁터는 아직 불분명하다. 초정약수의 세계적 브랜드화를 위해서 초정행궁터의 발견과 복원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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