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와 만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부터 최고 학부까지 인생의 지도자인 교사를 만나 새로운 세계와 눈을 뜨게 된다. 또한 스승의 헌신적인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 삶의 향방과 한 인격체를 완성하는 등불이 된다.

정신적 버팀목 돼야

교직이란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직업으로서 확고한 교육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개념 없는 스승들도 간혹 있지만 세태에 흔들림 없이 사도(師道)의 명예를 지키는 훌륭한 교사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 다행스럽다.   

최고의 지성인을 양성하는 대학에서는 가짜 학위와 논문 표절 등으로 시끄럽고, 중등학교에서는 학교 폭력문제를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해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생겨나기도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믿고 따르는 교사에 의해 성추행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고 촌지 문제로 스승에 대한 고마움조차 나타낼 수 없는 현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결 중 하나가 스승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제적 도움보다는 어려울적 마다 버팀목이 돼 주고 채찍을 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과 농사꾼 황상은 신분을 뛰어 넘은 아름다운 사제관계를 맺기도 했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서 “세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그 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 중 좋은 점을 가진 사람의 장점을 가려 이를 따르고, 좋지 않은 점을 가진 사람의 나쁜 점으로는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반드시 학식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 인사문(人事門) 스승의 복제(師服)’조에서 “아버지가 낳아 줬기 때문에 이 몸이 있게 됐고, 임금이 길러 줬기 때문에 이 몸이 편안하게 됐다. 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스승의 공덕이니 그 보답하는 예가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라 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도 했는데 오늘날의 스승은 노방초(路傍草) 신세나 다름없을 정도로 전락됐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은 반드시 필요하나 정신적 지주일 뿐 글과 말로 가르치기 보다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몸소 보여줘 수행자 스스로 각오(覺悟)하게 도와주기만 한다. 참 스승은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법정스님은 “참다운 스승을 만나야 인생의 행로에는 눈 밝은 경험자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앞서 길을 가면서 터득한 지혜가 뒤따라가는 우리에게 큰 등불이 돼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할 정신적인 지주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데 이는 의지할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서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있을 때 관계가 유지된다.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했거늘 요즈음은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지적하면 경찰에 고발하는 등 교권이 추락하고 있다.

또한 일부 교육자들의 부정부패는 참다운 교육관을 지닌 스승들에게 먹칠을 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스승도 좋은 제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스승이 되듯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발전(敎學相長)해야 한다. 

서로 배우는 ‘스승과 제자’

위대한 스승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훌륭한 제자를 자랑과 보람으로 여겨야 함이 당연하다. 가르침 자체가 촛불이어야 함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제자를 가장 두려운 후배로 상대해 교사는 많으나 스승은 적다는 말을 실감케 해서는 안 된다.

올해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을 수상한 섬마을 부부교사와 같이 어려운 지역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열정과 희생을 감수한 참된 선생님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를 밝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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