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동으로 전 근무지에서 가지고 온 짐 중 바로 필요치 않은 것은 사무실 한 쪽에 밀어 놓았었다. 한 달여가 지나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짐을 하나하나 풀다보니 대부분이 책과 업무자료였다. 짐정리가 대충 끝날 때쯤 책사이로 낡은 지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직원이 태국 출장을 갔다가 오면서 선물로 준 지갑이다. 몇 년을 사용하다보니 솔기가 터지고 색도 바래 새로운 지갑으로 바꾸면서 버리지 않고 따로 둔 것이다.

“여보! 당신은 왜 자꾸 쌓아 놓기만 해요. 필요 없는 물건이나 낡은 것은 좀 버리세요. 우리 집이 고물상도 아니고….” 가끔 아내가 나에게 하는 잔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왔다. 고민을 하다 지갑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지갑 위로 빛바랜 화면 하나가 나타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다. 둘째 형님께서 쓰시던 가죽지갑을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주셨다. 그 당시 그런 지갑은 매우 귀했다.

설날 받은 세배 돈이나 가끔 친인척 어른들이 오시면 주시던 용돈들을 그 지갑에 차곡차곡 넣고는 애지중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갑을 열어도 보고, 세어도 보면서 흡족해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갑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학교 갔다 오자마자 책상서랍에 있는 것을 확인까지 했는데 말이다. 나는 책상이며, 옷장을 이 잡듯 찾아보았지만 지갑의 조그마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께 사실을 말씀드리자, 이번엔 어머니께서 온 집안을 찾아보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 나는 옆 동네에 사는 친구와 함께 집에서 숙제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그 친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친구가 뒤가 마렵다며 일찍 집으로 간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어머니께 자초지정을 이야기 해드렸더니 한참이나 난감해 하셨다.

아마,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나와 함께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 친구의 착한 심성을 어느 정도는 아셨던 것 같다.

“얘야! 가져간 사람보다 잃어버린 사람의 죄가 더 크다고 하는구나.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남을 의심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고… 이젠 더 이상 그 지갑에 대한 생각은 덮자구나.”

그 후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혹시나 해 초등학교 졸업앨범에서 찾아보았지만 그 친구는 없었다. 그 동안에 전학을 가지 않았나 싶다.

대학 졸업 후 농협에 입사해 첫 번째 담당한 일는 출납업무였다. 하루 종일 수많은 돈에 시달리다 보니 나중엔 돈만 보아도 지겹게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일일 결산 후 돈이 부족해 밤늦도록 돈을 세고 또 세었으나 결국 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해 우두커니 출납실에 앉아 있으려니 담당 대리께서 부르셨다.

“류형, 돈에 대해서는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어선 안돼, 담당 대리인 나까지도 말야.”

나는 그 말씀을 철칙으로 삼으며 지금까지 농협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오늘 후배들에게 경험이야기를 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농협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남을 의심해 얻은 것 보다는 남을 믿어서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라네. 그래서 나는 의심을 늘 지갑 속에 꼭꼭 넣고 다니고 있지.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말야.”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