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4대 임금 세종은 1444년 1월 27일 청주에서 초수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이곳에서 요양하고자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 행궁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달 뒤인 2월 28일 서울을 출발해 3월 2일 초수리에 도착했고 윤 7월에 다시 한 번 더 방문해 모두 117일 동안 요양을 했다.

임금이 머무른 ‘청원군 주왕리’

그런데 초수리의 행궁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기록은 없지만 전후 사정으로 보아 한달여 만에 목재를 사용해 소규모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448년 3월 화제로 소실될 때까지 4년 동안은 행궁을 관리하는 감고(監考)가 배치됐다.

그런데 세종이 초정약수를 이용해 병을 치료했다면 당연히 초정약수가 있는 가까운 지역에 행궁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 또한 있었으므로 초수 인근 지역에 행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견이 있었다. 

이는 현재 충북 청원군 북이면 선암 1구의 주왕리(住王里) 마을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세거해 온 주민들에 의하면 세종임금께서 초수리에서 요양을 하실 적에 이 마을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승돼 왔다. 마을 이름은 왕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 큰궐고랑, 조왕이, 주왕이, 주왕리라는 한글 이름을 비롯해 주왕(主王·住王·主往·駐王) 등 한자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처럼 초수행궁과 관련된 지명이 있지만 자세한 조선시대의 지지(地誌)는 물론 1980년 후반까지만 해도 초수행궁터에 관한 사실(史實)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87년 간행된 ‘충청북도지명지’와 1991년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땅이름사전’, 1997년 간행된 ‘청원군지명지’를 비롯해 필자에 의해 1999년과, 2002년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주왕이 마을이 행궁터라고 했으나 사료적 근거 불확실로 학계에서 논란이 됐다. 그리고 2008년 충북대학교 김진식 교수에 의해 ‘청원군지명유래’에서 ‘조선지지자료’를 인용해 주왕리에 임금이 머물렀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었으나 자료를 입수하지 못해 필자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1910∼1911년대 무렵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충청북도편 3책(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고2703)에는 지금까지 청원군 북이면 주왕리 마을에 관한 마을명이 정확하게 기술돼 있다. 한자명 ‘주왕(住王)’과 언문 표기 ‘쥬왕이’로 돼 있고 인근에 주막명 ‘쥬왕이쥬막’이라는 술집 상호도 보인다. 또한 주왕리 마을 비고란에 “선암리 옛날에 한 황제가 있었다. 이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신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 같다”라고 해 세종임금을 확실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후에 선암리로 개칭됨)에 임금이 머물렀음을 확인시켜 행궁터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또한 이 자료에서는 북일면 초정리의 리동명(里洞名) 지명은 “椒井里” 언문(諺文) 표기로는 “초정니” 비고란에는 “椒井里”로 돼 있으며, 부락명 지명은 “교자리(交子里)”라 표기하고 비고란에 “추정리(楸井里)”라 해 초정리의 다른 이름이 보이고, 명소(名所)로 “炭酸水噴泉” 비고란에는 “元椒井里ニアリ”로 표기되어 있으며 아쉽게도 행궁에 관해서는 언급돼 있지 않다.   

행궁터, 종합적 연구 이뤄져야

충청북도편 ‘조선지지자료’는  한일 합방 이후에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자료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기 이전 한글로 표기된 우리나라의 전래지명이 집단적으로 출현하는 사료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도 주왕리 지명만 언급되고 행궁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향후 궁방양안(宮房量案), 아문둔전양안(衙門屯田量案), 역둔토양안(驛屯土量案), 개인양안, 성책(成冊) 등 토지문서나, 관원배치 현황을 비롯해 왕실소유지를 표시했던 금표(禁標)의 발견과 현지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등 학술적인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