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을 말한다. 그러면 한글의 고향은 어디일까? 한글의 고향이 바로 ‘보은’이라는 명쾌한 해답이 나왔다. 한글을 창제한 분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한 고승의 피나는 헌신이 있었다.

한글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그 주인공인 고승은 바로 복천암 스님 신미대사이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는 호서제일의 선원인 복천암(당시 복천사)의 역사책 복천사지(福泉寺誌)가 발간됐는데 이러한 사실이 바로 여기에 수록돼 있다. 이 복천사지를 보면 신미대사는 조선 태종 3년(서기 1403년)에 태어나 성종 11년(서기 1480년) 78세로 열반했다.

그는 조선시대 당시 유일하게 범어와 티베트어에 능통한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중국 고승들에 의해 번역된 불교 경전들은 오역이 많고 부처님의 말씀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범어로 된 불교원전을 그대로 읽기위해 범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것은 나중에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 되는 계기가 된다.

훈민정음 창제에 신미대사가 직접 관여한 정황은 다음과 같다.

세종은 본격적인 훈민정음의 서문과 본문이 완성된 1446년 어느 날 수양대군과 신미대사를 불러 “우리글이 다 만들어졌다. 내가 노래를 좋아하니 우리글로 노래를 한 번 지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종의 지시를 받은 신미대사는 동생 괴애(乖崖) 김수온과 함께 한글로 된 대서사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1447)’을 완성한다.

이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도 1445년에 시작돼 1447년 완성됐다. 불교경전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바로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는 증거이다.

또 세종은 한글창제의 보답으로 신미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은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시호(諡號)이며 우국이세(祐國利世)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문구이다. 이점은 바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신미대사와 한글창제에 나섰던 수양대군은 후일 왕이 된 후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찾는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복천암에 다녀간 그해 세조의 쾌유를 빌기 위해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 상원사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갔다.

그러나 절이 허물어지고 비가 새 신미대사는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팔아 상원사에 기와와 기둥을 세우는 등 중창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이후 스님은 상원사를 중수했다는 소식을 세조에게 전했다. 세조는 신미대사에게 다시 상원사 중수 권선문을 써서 보낼 것을 요청했다. 세조는 신미대사가 쓴 권선문에 친필로 한문으로 써서 한글로 번역해 250명의 신하들에게 결인을 받고 시주를 거둬 신미대사에게 보낼 정도로 각별했다. (중략)

대서사시 ‘월인천강지곡’ 완성

신미대사는 충북도 영동에 영산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산 김씨 세보에 보면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돼 있다. ‘집현전 학사’였으며 특히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신미대사는 범어의 음성학을 통해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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