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에 단풍이 울긋불긋하다. 산 능선에는 이미 나뭇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긴 겨울 여정이 시작됐다. 도심 속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아래 무수히 떨어진 낙엽들이 발목을 감고 맴돌더니 길섶으로 맥없이 밀려나간다.

지난 겨울 조류독감의 악몽

낙엽을 보자니 지난 겨울 광풍처럼 지나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로 희생된 천만의 생명들이 생각난다. 거대한 물결에 앞에 한 사람의 작은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잔인한 계절이었다. 그 현장은 생명을 거두던 낯선 작업으로 보기조차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처사를 두고 잔혹하다느니 잔인한 인간들이라며 살생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한 마디 반론조차 제대로 못한 채 섭섭함을 마음 속 깊숙이 꼭꼭 저며 둘 수밖에 없었다. 섭섭함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이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 속 문신이 돼 버렸다.

기온이 떨어지고 낙엽이 지는 계절이 되니 가을의 낭만보다 그 겨울의 아픈 생각이 앞선다. 어떤 이들은 그 겨울의 사람들이 잔인했다고 떠 올리겠지만, 난 계절의 잔인함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동물들의 희생도 컸다. 그러나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누구도 하기 싫던 현장을 묵묵히 지키던 사람들의 희생도 못지않게 컸다.

당시의 수많은 희생의 현장처럼 가로수길에 낙엽들이 지금 무수히 떨어진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밟으면 그 현장의 아수라장이 떠올려질 것 같아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젠 누구의 희생이었는가 보다 왜 그런 현장이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계절이다.

계절은 바야흐로 어떤 철새는 북쪽으로 떠나고 어떤 철새는 날아든다. 제 삶의 터전을 각각 달리하는 시기이다. 철새를 바라보는 감성도 많이 바뀌었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생각하면 올 겨울이 추울지 따뜻할지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철새에 달린 신세가 됐다.

수 해 전부터 조류인플루엔자의 발생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3년간 터울을 두고 발생하던 것이 2년의 터울을 두고 발생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류독감의 원인을 애매한 철새를 지목하면서 세간의 의문을 샀다. 그러나 자꾸 발생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 보니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류인플루엔자는 철새에서 집에서 기르는 가금으로 옮기는 1차 경로는 거의 확실하다. 그 경로를 막기 위해 철새가 몰려드는 습지나 강과 하천은 방문하지 말라고 하고, 상대가 없는 공허한 벌판을 향해 소독도 해 본다. 완벽하게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조금이라고 그 가능성을 줄여 보겠다는 사람들의 말 못할 고충이다.

철새에서 가금에게 오는 것이 1차 전염경로라면 2차 경로는 무엇일까? 바로 농장에서 다른 농장으로 전염되는 것이다. 1차 경로와 달리 2차 경로의 차단은 사람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오리나 닭이 사는 농장 주변은 항상 깨끗이 하고, 소독을 하고, 철새의 접근을 막아준다. 주인은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후에는 신발과 의복을 세탁하고, 농장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소독한다면 적어도 다른 농장에서 내 농장으로, 내 농장에서 다른 농장으로 전염은 막을 수 있다. 어려운 것 같지만 생활화 하면 참 쉬운 방법이다.

농장의 청결함이 가장 중요

이것이야 말로 올 겨울에 또 다시 살생으로 인한 무수한 동물들의 희생을 막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혹한에 떨던 공무원들과 군인들의 희생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겨울을 겨울답게 나기 위해서는 축산 농가의 손에 크게 달린 세상이 됐다. 낙엽 지는 가로수 아래서 다시 한 번 희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올 해는 부디 동물도 사람도 애매하게 희생되지 않는 따뜻한 겨울이 됐으면 한다. 잔인한 겨울의 경험은 이미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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