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기관으로는 규장각이 있었다. 세조 때 경복궁 인지당에 설치됐던 규장각은 송나라의 용도각과 천장각의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등 프로젝트화 됐지만 임금이 지은 글을 보관하는 어제존각의 기능과 함께 관리를 둬 도서대출 반납업무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초기엔 왕실 관련 자료만 수집

이후 숙종 때에 들어와 역대 임금의 글을 보관하기 위해 종정시 옆에 작은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 했으나 그 규모나 제도는 미흡했다. 규장각이 본격적으로 왕실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이 정립 한 시기는 정조 때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 하자마자 가장 먼저 체재공 등에게 지시를 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조의 어제를 수집해 출판하게 했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고 이곳에 역대 임금의 글과 왕실관련 자료들을 보관했다. 또한 효종 때 강화도 행궁을 수선해 서고를 설치했으나 관리가 미비하자 강화유수 객사 건물터에 외각을 설치해 이곳에 왕실 자료를 나눠 보관하게 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왕실 자료가 바로 강화외각에 소장됐던 도서들이다.

규장각이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처럼 고금도서를 소장하기는 했으나 국가의 모든 정보자료를 수집하지 않고 왕실 관련 자료만 수집 보관한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출판물이 흔치 않던 시대여서 규장각이 국립중앙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규장각에는 도서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사서직에 해당하는 검교를 비롯해 건물을 관리하는 창고지기 등 잡직 직원들을 뒀다.   

규장각은 왕실 관련 도서를 관리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임금과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는데 있어 당시로는 최대의 예법을 갖췄다. 특히 어필이나 어진 등 자료를 규장각에 보관 또는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도서를 점검을 할 때, 임금이 친히 시험을 치르는 것을 참관 할 때에는 반드시 의식행사를 시행했다.      

규장각의 기능에 대해서는 정조 1784년에 완성돼 출판한 ‘규장각지’에 잘 기록돼 있다.

규장각에서는 임금의 지은 여러 문체와 기타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는 수서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출판부의 기능도 있어 임금이 지은 글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교정과 어제를 편찬하고 활자를 주조해 국가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또 규장각에서는 서적을 사부분류법에 의해 분류하고 한지로 된 책을 햇볕에 말리는 쇄서의 서고관리와 도서를 대출·반납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규장각은 문치주의를 이상적으로 실천한 정조의 아이디어로 처음에는 역대 임금의 어제·어필·어진 등을 봉안(보관)하는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정조 5년(1781)에 규장각 현판을 주합루로 옮겨 달면서 학술연구기관과 정책연구기관으로 변모했다. 그리해 초계문신(규장각에 특별히 마련된 연구과정을 밟던 젊은 문신) 제도를 도입하고, 임금이 직접 시험에 참가 하는 등 인재를 국가적 싱크탱크로 선발 육성해 정치기구로 양성화 시켰다.

이후 규장각은 각신들이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기능을 수행하는 왕의 친위세력인 통치의 측근들로 일원화되면서 학문진흥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와 개혁정책을 펼치는 정치적인 목적의 강력한 기구로 육성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것은 정치적으로 세력기반을 강화하고 문화적으로 이념과 정책 연구를 진흥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즉위 이후 탕평의 완성과 강력한 군주권 수립으로 개혁을 이루고자 친위세력인 초계문신을 통해 주자학의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 시켜 규장각 각신들을 개혁의 주체적 실천자로 변모시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정책연구기관으로 변모

규장각이 처음 의도와 달리 국가도서관으로서의 기능에서 다소 벗어나 왕립학술기관으로 정치기구화 됐지만 본래 도서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규장각에 해당하는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의 지적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여 국민에게 제공하는 국가 대표 도서관이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서 다양한 정보제공과 종합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으면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