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목욕을 청결의 수단 외에 미용, 건강, 질병치료 또는 의식의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민족의 청결사상과 백색 피부에 대한 숭상은 다른 민족에 비해 유난히 높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단군신화가 나오는 옛 책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향나무인 박달나무 근처라고 전해지며, 이것은 고조선 사회의 한국인들이 향유, 향료를 애용하여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숭배한 사상을 뜻한다.   

마음의 죄 씻어 내는 의식수단

우리 민족은 목욕 재계(齋戒)를 규율로 삼는 불교가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자주 하게 되고 향의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또한 고귀한 궁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공중 목욕탕이 사찰과 가정에도 생겨났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 등 종교가 생활화되면서 목욕은 신체를 깨끗이 닦는 단순청결 개념에서 마음의 죄를 씻어 내는 신성한 의식수단으로 종교행사나 엄숙한 행사에는 반드시 목욕을 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목욕은 출생에서부터 사망후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 수단 외에 청결 개념으로 목욕문화가 발전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일반 서민 보다는 궁궐을 중심으로 고급 목욕문화가 발전했다.

우리나라 문헌상 가장 오래된 목욕 기록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동천에서 알영은 북천에서 목욕을 했으며 고구려의 서천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반은 온탕을 사용했다. 백제도 부여 능산리 사찰터에서 발견된 백제대향로 뚜껑에 5명의 신선들이 천상의 소리를 연주하며 장쾌한 폭포수 아래에서 머리를 길게 느려뜨린 채 목욕재개하는 조각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목욕을 미용 또는 청결이 아닌 의식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음력 6월 15일인 유두일(流頭日)이 되면 남녀는 물론이고 노소까지 ‘동쪽으로 흐르는 물(東流水)’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과 여성활동의 자유성으로 목욕문화가 민간에까지 발달했다. 송나라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 사람 남녀가 어울려서 혼욕을 하는 것을 구경했으며 여름날 냇물에서 남녀가 벌거벗고 목욕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의 남녀 혼욕을 음란행위로 여길 수만은 없다. 고려인들은 불교를 중시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목욕하고 출타한 뒤, 돌아와서 한번 더 목욕을 하는 등 재계(齋戒) 일상생활처럼 여겨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부정을 멀리하려고 목욕을 했던 것이다. 서긍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목욕을 거의 하지 않는 송나라 사람들과 비교하여 고려인들의 정서를 잘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온천욕은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목욕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의 영향을 받아 남녀가 혼욕을 하는 공중목욕보다는 가가호호 큰 함지 옹기속에서 더운 물을 끊여 붓고 위생적으로 목욕하는 문화가 민간에서도 발달했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는 약재를 이용한 미용과 건강을 위한 목욕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역대 임금들이 각지의 유명 온천지를 찾아 휴양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목욕을 보통 일 년에 2∼3번 정도로 목욕을 자주 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부정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목욕을 자주하면 피부에 구멍이 열려서 기(氣)가 밖으로 빠져나감을 막기 위해서라는 목욕에 잘못된 인식으로 오히려 몸에 이가 많으면 오히려 장수한다고 믿는 등 위생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전신목욕은 여름에만 더위를 먹으면 홍화 삶은 물에 목욕을 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찬물에 재계의 행위로 했다. 겨울철에 목욕을 하지 않은 것은 목욕 시설이 없어서가 아니라 땀구멍이 열려서 차가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온천·한증탕 질병치료 애용

그렇다고 전혀 목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상적인 생활로 세수는 늘 하였으며, 간편 목욕인 뒷물로 국부와 항문은 자주 씻고 속옷을 자주 갈아 입었다. 조선시대에는 온천과 한증탕 개발로 민간에서도 많이 질병치료 목적으로 애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민간의 목욕에 대해 “하루 목욕하면 3일 휴식하는 것과 같고 2일 목욕하면 6일 동안 휴식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목욕을 휴식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다.

우리고장 초정약수도 고려시대부터 개발돼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세조임금이 목욕을 하기위해 다녀가는 등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수질이 저하돼 보존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때이다.

오는 8월 13일과 14일 초정리 일원에서 약수축제가 열리는 것도 이러한 약수를 홍보하여 브랜드화 하려는 지자체의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초정약수가 그 옛날 명성을 되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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