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함께 근무 했던 선배의 막내아들 혼사가 있었다. 마침 관내에 행사가 있어 참석을 못하고 축의금만 보냈더니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근황을 이야기 하던 중 선배는 갑자기 흥분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 글쎄 생각 좀 해 봐. 내가 직장 떠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초청장 보낸 사람의 반도 안 왔다네. 그 동안 내가 자기들한테 한 것이 있는데 말야. 내가 그동안 헛산 것인지 아님 세상을 너무 모르고 지낸 것인지...”

“선배님, 모두들 바쁘게 살다보니 그렇겠지요. 선배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덕을 배픈 것이 어디 가겠습니까?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하며 위로를 하였다.

나이가 들면 아이들과 같이 되어 조그마한 일도 참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서운한 감정이 든다는 어느 분의 글이 생각이 났다. 나 역시 몇 년 지나면 그 선배님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벌써부터 서글퍼진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아내는 자기의 생일을 챙겼다. 아침이 지나 저녁때까지 아이들이 전화가 없자 꽤나 서운했는지 나에게 푸념을 하기 시작한다. “남의 자식 흉볼 것이 아니네요. 아니 어떻게 엄마 생일을 잊어버려 자식도 다 쓸데없어…”

“여보! 그렇게 말하지 마오. 아들은 국방의 의무 차 군대에 있고, 딸은 공부하러 중국에 있는데 어떻게 당신 생일만 생각하고 있겠소? 그리고 이제까지 그런 말 한번 안하더니 당신도 늙어 가는가봐”하자 아내는 화살을 바로 나에게 돌리며 “뭐요? 내가 말을 안 하고 살아서 그렇지 당신이 아내 생일 한번 안 챙기니까 아이들도 당신을 보고 배워서 그런 줄도 모르고 애들 편을 들기는…”하며 눈을 흘긴다.

하기야 아내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생일이면 케익 하나 사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니 아이들도 그 정도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째든 아내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인근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에는 몇 분의 노인 분들이 그늘진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고, 젊은 사람 몇은 넓은 공간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한참을 공원에서 운동하고 땀을 식힐 겸 잠시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옆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 하는 두 분의 대화 내용이 그대로 들렸다.

“내가 나이 스물에 혼자되어 아들 하나 믿고는 가르치고 키워서 짝을 맞추어 주었더니, 이놈이 결혼 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퇴근만 하면 피곤하다고 신혼 방으로 쏙 들어 가서는 아침에나 얼굴을 한번 보여주고는 쏜살같이 출근하더라고, 그 뿐인 줄 아슈. 월급을 타와도 지 처에게 모두 주고 내가 돈 좀 달라면 며느리한테 타 쓰라니 아이구 죽일 놈. 내 청춘이 아깝지 아까워…”

“아이고, 그 집 아들만 그런 것 아니라우. 모든 만물이 때가 되면 짝을 찾아 가는 것이 순리인데 당연한 일을 가지고 뭘 그라우 ‘인생은 다 그런겨’ 하고 생각하면 속 편한 일인데 나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디 나라고 마음이 늘 편안만 하겠소. 그럴 때마다 나는 죽은 영감이 마지막 길에 나한테 한 말을 기억하면서 산다우”하시며 할머니는 먼 하늘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는 말을 계속 이었다.

“암으로 죽어가는 영감이 내 손을 꼭 잡고는 그러더라고. 자식들 효도는 어릴 때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으니 다 받은 것과 같으니, 이제부터는 자식들이 혹시 서운하게 하더라도 ‘다 그런겨’하고 살으라고, 그래야 집안이 편안하고, 대접을 받는다고” 할머니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어느 사이 시원한 소나기가 돼 공원을 촉촉이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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