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내 돈 안 주는겨? 통장에 돈이 있으면 돈을 줘야지 아까부터 기다리라고만 하니, 혹시, 촌 노인네라고 우습게 보는겨?” “할머니 돈을 안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산이 안 되서 그러니 조금 기다려 달라는 것인데…” “아까부터 전산, 전산 하는데, 전산이 뭐여? 우리 아들이 보낸 돈이 통장에 있으면 주면 되지. 왜 안 주는겨, 아이구! 답답혀. 오늘 계약금을 주어야 하는데 큰일이네…”

1달 전 농협 창구에서 있었던 한 장면이다. 고객 입장에서 통장에 돈이 있는데 전산장애로 돈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고, 농협직원 역시 전산 장애로 출금처리를 할 수 없어 돈을 드릴 수 없으니 답답하기는 매한 가지였다. 은행에서 전산장애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혹시 일어난다고 해도 바로 고치곤 하여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달랐다. 시시각각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필자 역시 초유의 사태를 맞아 마냥 전산 되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여러분 은행의 생명은 신속하고 정확한 업무 처리입니다. 그러데 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고객은 우리 농협을 믿기에 돈을 맡겼고, 필요해서 돈을 찾으려는데 농협사정에 의해 돈을 못 주는 것은 농협과 고객과의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급하시지 않은 고객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하시되, 급하신 분들은 통장을 확인한 후 잔액이 있으면 청구서만 받고 출금처리 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 후 할머니와 같이 돈을 못 찾아 객장에서 안절부절 못하시는 분들은 한명도 없었지만 사실 그와 같은 일을 처리한 직원들의 불안감은 매우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그 결정은 잘 한 것 같다.

전번 장날이었다. 객장 문을 열자마자 그 할머니께서 찾아 오셨다. “아니 글쎄 그 놈의 빨갱이가 농협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아이고 죽일 놈들, 그 놈들은 언제 심뽀를 고치려나, 저기 큰 색시! 이젠 괜찮아? 난 그것도 모르고 색시들한테 화만 냈으니 미안해,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할머니두 저희가 빨리 고쳤어야 하는데 못 고쳐서 그런 건데요 뭐, 저희가 죄송하지요.” “그래도 이 늙은이를 무얼 보고 그 큰돈을 주었어. 우리 아들이 가서 고맙다고 하라고 해서 왔어”하시며 할머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영업대에 올려놓고는 “이거 토마토인데 나누어 먹어, 그리고 늙은이 흉보지 말고”하며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자하고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신다.

점심 때 할머니께서 주고 가신 토마토를 직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니 어머니 냄새가 식당 안에 가득하다. 비록 금번 전산사태로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 또한 많았던 것 같다. 다른 회사들이 해킹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도 주위를 뒤돌아보고 좀 더 예방을 잘 했다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자만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았다. 또 위기관리 능력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고객들의 중요한 재산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분들이 필요할 때 신속하고 안전하게 돌려드려야 하는데 너무 안전을 강조하다 보니 많은 고객 분들에게 불편을 드렸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동안 직원들이 고객 분들에게 친절과 정성으로 신뢰를 잘 쌓아 온 덕분에 불평 하시는 분들보다는 걱정을 해주고 위로를 해 주시는 분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농협의 나이가 올해로 벌써 50살이 되었다. 이젠 중후한 중년의 멋과 편안함 그리고 안정감을 고객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때 인 것 같다. 그리고 더 안전한 민족은행으로 또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농협이 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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