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선생(先生)’이란 말이 나온 것은 고려 때부터인데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불리면서 시작됐다. 선생이란 용어는 논어(論語)시대에는 나보다 먼저 난 아버지나 형님을 의미했으며, 맹자(孟子) 시대에는 나보다 먼저 도를 깨친 사람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선비들이 술을 마시며 글을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건, 낮건 간에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大人)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선생이란 호칭이 상당한 권위와 위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땅에 떨어진 권위 일으켜 세워야

우리나라에서 글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중국보다는 상당히 늦다.

조선 초기의 문헌에 ‘스승’이 나오는데, 어원을 따진 ‘동언교락(東言巧略)’에는 사(師)의 중국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承)이 스승의 어원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주(州)·부(府) 등 큰 고을 향교 스승은 교수(敎授)로 불렸고, 작은 고을인 군(郡)·현(縣)의 스승은 훈도(訓導)로, 향촌의 사설 서당 스승은 훈장으로 각각 불렸다.

영국에서도 빅토리아왕조시대부터 선생에 대한 호칭이 있었는데, ‘사람 사이를 잡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inte-taker’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 전통의 스승관인 사제 간에 간격을 유지하는 것을 스승의 첫째 조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스승에 대한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만, ‘스승의 그림자는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법도였다. 즉, 사제지간에는 그림자조차 밟지 말아야 하는 어떤 적정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법도가 분명히 존재한 것이다.

스승들 역시 제자 앞에서 배고프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이나 희비애로(喜悲哀怒) 같은 기본적인 인간성색(人間聲色)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그 사례를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공자(孔子)가 어느 날 제자인 자로(子路)가 옆에 있는 줄 모르고 생각 없어 “배고프다”는 말을 했다. 그는 스승이 제자 앞에서 지켜야 할 어떤 사이를 스승 자신이 침범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시조인 김굉필(金宏弼)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 정성스럽게 말리던 중 고양이가 굴비를 물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옆에 제자 조광조(趙光祖)가 있는 줄도 모르고 화를 내며 고양이를 꾸짖었다.

조광조는 성색을 드러낸 스승의 잘못을 직언했고, 김굉필도 제자에게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사과했을 정도로 스승은 교육적으로 그릇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법도였다. 과거 사표가 됐던 스승들은 예외 없이 사표가 될 법도를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아래서 훌륭한 제자들이 무수히 나올 수 있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스승(선생) 노릇하기가 어렵기는 매 한가지다.

과거 스승에 대한 권위와 위엄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자들이 스승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을 정도였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사제지간의 간극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율곡(栗谷)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보면,  ‘스승을 쳐다볼 때 목 위는 봐서 안 되고, 선생 앞에서는 개를 꾸짖어서도 안 되고, 웃는 일이 있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스승과 겸상할 때는 7푼만 먹고 배부르게 먹지 말아야 한다’ 기록돼 있다.

성균관 학칙(學則)에는 길에서 스승을 만날 때 행동요령이 적혀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길 왼쪽에 서 있어야 하고 말을 타고 가거든 몸을 엎드려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 자체가 숨이 막힐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했다.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라

이랬던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권위는 온 데 간 데 없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발에 차이는 것은 예사고, 심지어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됐다. 그야말로 ‘inter-destroyer’ 현상이 벌어지면서 선생님에 대한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교권회복은 회복불능 상태로 빠져든 것이다.

과거 스승에 대한 존엄성의 일부분만이라도 지켜졌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선생님들이 ‘좋은 선생님은 잘 가르치고, 훌륭한 선생님은 스스로 해 보이며, 위대한 선생님은 (제자들의)가슴에 불을 지핀다’는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의 글을 음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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