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시 낭송회가 속리산에서 있었다. 속리산 가을 단풍을 배경으로 넓은 잔디밭에서 시를 조용히 낭송하는 분이나 가을볕에 눈을 지그시 감고 시를 음미하시는 분이나 모두 한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었다.

낭독된 시 대부분은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주옥같은 것이었고 몇 분들은 근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시인들의 작품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기관장께서는 좀 특이하게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라는 한시를 낭송하시곤 멋진 해설까지 해주셨다.

그 시의 내용은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아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후세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라는 것이었다. 자주 인용되는 서산대사의 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시이기에 가끔 읊조려 본다.

지금은 장성하였지만 우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는 모습이나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 하곤 하였다. 필자가 늦둥이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 모습은 보지도 못했고 할아버지도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을 텐데 자는 모습이나 밥 먹는 모습이 너무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보 참 이상도하지. 우리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아버님 판박이야. 그렇지?” “아이고 그럼 그 씨가 어디로 가겠어요.” “아니지, 밥 먹는 모습은 유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아주 어릴 때 본 아버님을, 그것도 식사하시는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여보 우리 애들이 어떻게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을 닮겠어요. 내가 보기엔 당신 밥 먹는 모습 그대로 구만…” “뭐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사실 아내의 말이 맞다. 아이들은 내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고,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고 배운 것이지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고 배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큰다” 는 말이 맞는가 보다

몇 년 전 생질 결혼식 때 일요일에 가면 좀 복잡할 것 같아 하루 일찍 대구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찾아 온 동생에게 누님은 정성을 다하여 저녁밥을 차렸고 나는 그 밥을 먹으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김치며, 콩자반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까지….

어머니께서 돌아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나갔기에 그 맛 역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 맛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는지 내 자신도 놀랐다. 태평양 먼바다에서 자기가 태어났던 강줄기를 찾아 온 연어처럼 나는 누님의 음식 속에서 어머니의 맛을 찾아 서서히 헤엄치고 있었다. “누님, 참 이상해, 어머니는 막내딸한테는 부엌일 안시키신다고 부엌 근처에도 못 들어가게 하셨는데, 언제 어머니한테 음식을 배웠어?” “배우긴,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 할 때 뒷모습만 보았지 내가 언제 배울 기회가 있었나?”하며 웃으신다.

올 봄 정기인사 때 함께 근무하던 직원이 청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2년 동안 함께 근무하며 정도 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근무한 직원이기에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 직원이 새롭게 근무할 지점으로 떠날 때 함께 동행했다. 지점에 도착하니 지점장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며 지점 상황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차 한 잔 마신 후 “지점장님, 정말 유능한 직원이니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일어나자 “류지부장님과 함께 근무한 직원들은 다 유능한 직원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어찌 용장 아래서 약졸이 있겠습니까?”하며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지점장이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정말 그 직원이 나의 뒷모습을 보며 무엇을 배웠을까 생각해 본다. 그 옛날 훌륭하신 선배님들을 보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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