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혁명의 시원이 된 금속활자가 발명된 시기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금속활자본 ‘직지’는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목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우리가 인쇄문화 종주국임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간행될 당시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정세를 살펴보아야만 인쇄술이 서양에 전파된 경위를 추적할 수 있다.

원나라 지배 받던 어두웠던 시기

오늘날 지구촌은 바야흐로 제3의 혁명이라 부르는 인터넷의 영향과 교통의 발달, 유학의 증가 등으로 세계화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전통문화 유산을 자국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영향이 민족주의적 국민관을 낳게 했다. 현재는 글로벌 시각과 스케일이 없어 그 국제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문화나 역사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소멸되어 간다.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문화재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직지’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이지 충청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관심조차 희박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영향이 어떠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태동하였는가는 치욕적인 속국이었던 원나라와의 관계와 고려 왕실간의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세계사적인 자료가 빈약하여 이를 증빙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는 고려 말기 직지가 간행되기 전후에서 조선왕조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직지’가 간행될 무렵 국제적 형세는 매우 복잡한 관계였는데 그 속박에서도 세계적 감각에 눈 뜬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 역사 속의 세계화를 위해 심혈을 쏟았다고 보는 이로는 고려 제26대 충선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충렬왕은 1275년 당시 원나라 왕실과의 혼인관례대로 쿠빌라이 칸의 딸인 쿠틀룩 켈미쉬 공주와 결혼, 이들 사이에서 충선왕이 태어났다. 충선왕은 22세 되던 해 1296년에 쿠빌라이 칸의 장남인 감말라의 딸 보타시린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데 원나라의 성종(成宗)인 테무르 칸은 그의 처숙이며 무종(武宗)인 카이산 칸과 인종(仁宗)인 아유르발리파드라 칸은 그의 사촌 처남이 되는 등 원나라의 황실과는 인척관계가 아주 가깝게 맺어진다.

충선왕은 1310년 4월 고려의 왕으로 원나라에서 심왕(瀋王)으로 승격되어 요동과 만주까지 통치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이 원나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이긴 했지만, 반만년 한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옛 고구려·발해·신라·백제의 땅이 하나의 나라로 묶여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에 인질로 있으면서도 한민족의 정신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금속활자와 같은 창안 정신이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충선왕이 살았던 시대는 고려가 39년에 걸친 전쟁 끝에 원나라에 지배를 받던 어둡고 침울한 서양의 중세시대와 같은 시기였다. 특히 고려는 원종 이후 충렬왕·충선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및 공민왕에 이르는 거의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유례없는 내정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었다. 원나라의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여 부마국(사위나라)화 되어 왕통은 왕씨와 원나라 왕실과 혼혈화되어 정통성이 무너진 시기였다. 또한 사회경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공출과 부역에 시달림은 물론 심지어 고려의 처녀까지 바쳐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이를 민족적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면으로 평가한다면 이 시기야말로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비록 외세의 힘을 빌리기는 하였지만 국제정치의 최상층부까지 뻗어간 시대였다.

특히 충선왕은 이런 시대상황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여 다뉴브강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세계화를 위한 체제와 윤리를 만들었던 뛰어난 국왕이었다고 보여진다.

중국 통해 서양으로 인쇄술 전파

충선왕은 필자가 발굴한 사위 정안군 허종이 ‘직지’를 간행하는 데 재정적 지원을 한 비구니 묘덕스님이 정안군의 첫 부인 수춘옹주 사후 다음의 부인이었을을 가능성을 두고 제작했던 ‘직지 오페라’가 공연되면서 부각된 바 있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직지’는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충선왕을 통해 자연히 인쇄술이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서방과 교류를 하던 중국을 통해 우리의 금속활자 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활자로드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우리 민족이 과학기술국임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활자 발명국의 원조를 내세우기 보다는 당시의 국제적 시대상황을 현명하게 고구하여 인쇄술이 인류문명에 미친 영향을 새롭게 조명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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