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농경사회에서는 해마다 농사력(農事曆·농사작업의 일정을 표시한 달력)에 맞추어 음력의 월별 24절기와 명절에 세시풍속 행사가 시행되었다. 세시풍속은 촌락과 민족마다 오래전부터 자생적으로 전승되는 의식의례 행사와 놀이지만 오늘날은 옛 문헌에 보이는 것 중에는 이름만 남아 있는 상징적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세시풍속은 한(韓)민족에 의하여 발생되고 전승되어 오는 고유의 것도 많이 있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외국 문화와 퓨전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나마 전통 풍속은 특별한 행사 때만 재현되는 민속문화재로 된 지 오래되었다.  

역귀경 행렬 증가

정월 초하룻날은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로서, 이날을 설날이라 하여 연시제(年始祭)를 지내며, 웃어른께 세배를 드린다. 예전에 우리 민족은 친척들이 한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래서 설날에는 친척 뿐만 아니라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하러 다녔고 손님에게는 술·고기·떡국을 대접해 풍요로운 정이 한가득 했다.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대여서인지 원거리는 정월 보름 전까지 세배를 해도 무난했다.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던 풍경을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인심이 인색하다.

오늘날은 자가용이 생활화되어 편리해졌음에도 직접 세배를 다니기 보다는 전화나 이메일 문자 메시지로 대신하고 곧바로 생활에 복귀한다. 

이촌향도(移村向都)로 도시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가정문화가 발전되면서 설 풍속도도 시골의 노인들이 자식 집으로 올라가는 역귀경 행렬이 늘고 해외나 국내 여행지에서 제사를 지내는 실속파들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동차가 흔치 않던 1970∼80년대만 해도 지금의 교통 정체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고향길은 멀기만 했다. 시골의 버스터미널은 그야말로 선물 보따리를 가득채운 귀성객들로 붐벼 명절을 실감케 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 산업역군들은 회사에서 마련해 준 귀성버스로 정든 고향집을 찾았다.  

설날에는 덕담(德談)이라 하여 서로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를 한다. 어른들은 새 지폐로 세뱃돈을 준비하며 아이들은 설빔에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가슴 설레이기도 한다.

설날의 놀이로서 남녀노소 즐기는 윷놀이, 마을 공터에서 여자들의 널뛰기, 개구쟁이 아이들의 자치기, 제기차기와 연날리기 등이 성행했다. 또 각 가정에서는 그 해의 신수를 보기 위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이나 점을 재미삼아 보기도 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골목길 놀이보다는 컴퓨터 게임과 씨름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또한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정겨움 보다는 양성평등 사상과 여성권익이 향상되면서 주부명절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시대병을 낳기도 한다. 사회가 점차 도시화 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 농가에서는 ‘나무시집보내기’라 하여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우는데 이렇게 하면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시골에 가서 보면 집 주변에 있는 살구, 대추, 호두, 감나무 등에 돌이 끼워져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첫쥐날(上子日)은 쥐불이라 하여 농촌의 밭이나 논두렁에 짚을 흩어 놓고 불을 놓아 잡초를 태워서 들판의 쥐와 논밭의 잡충을 제거한다.

대보름날에는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서 빈 깡통에 철사로 끈을 매달아 송진이 듬뿍 밴 관솔 불을 넣고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는데 불깡통이 활활 타오르는 광경이 도심의 야경보다도 휠씬 향수를 자아냈다.

입춘(立春)날에는 ‘입춘 써붙이기’라 하여 대문·난간·기둥에 봄을 축하하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글귀를 써 붙이는데 요즈음은 민속촌이나 전통 고가에서 더러 볼 수 있을 뿐이다.

도시화 인한 전통적 의미 퇴색

또 보름 전날 농가에서는 그 해의 오곡이 풍성하여 거두어들인 노적가리를 높이 쌓이라는 뜻에서 볏가릿대를 세우며, 이날 밤에는 제웅(짚으로 만든 사람 형상)을 만들어 그 속에 약간의 돈 또는 음식과 함께 액년에 당하는 이의 성명, 생년월일시를 적어 넣어 우물가, 풀숲, 길가나 다리 밑에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보름날에는 마을 동신제나 가정에서 고사를 지내고, 새벽에는 귀밝이술과 부럼을 깨물고 여러 가지 나물에 오곡밥 또는 약밥을 해 먹었다. 또 보름날 밤에는 풍요의 상징인 달빛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며, 자기 나이 만큼 다리 밟기를 하여 액운을 없앴다.

세시풍속은 면면히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미풍양속이며 미래의 삶이므로 시대가 변해도 민족성을 버리지 못한다. 과거로 반드시 회귀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의미에서 전통 풍습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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