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물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시의 형성과정을 보면 거의 강이나 하천을 끼고 발전해 왔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보청천은 보은의 얼굴인 동시에 젖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유익한 하천도 몇 년에 한번 씩 집중호우나 장마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뿐인가, 한 마을을 자연스럽게 둘로 분리시켜 풍습이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변화시키기도 하니 참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통을 위하여 다리를 놓기도 하는데 그런 다리 중 하나가 징검다리다. 징검다리는 대개 하천의 얕은 곳을 골라 커다란 돌을 사람 걸음 폭에 맞추어 듬성듬성 놓는데 장마 때가 되면 거의 다 떠내려가 다시 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운치나 정겨움으로 따진다면 이만한 것도 흔치 않다. 이른 봄 징검다리를 건널 때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뾰족이 머리를 내밀며 인사하던 버들강아지와의 첫 만남이나, 한여름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들녘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널 때의 그 시원함과 상쾌함, 그리고 따스한 가을볕을 등지고 징검다리에 앉아 둥둥 떠내려 오는 단풍잎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상념의 시간 등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아름답게 펼쳐지는 풍경이다. 그런 운치 있는 징검다리가 보은 보청천에도 있다. 이평교 아래에 있는 징검다리는 꽤 크다. 나는 새벽마다 이 징검다리를 건너서 교회를 다닌다. 마치 나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징검다리인양…. 돌아오는 길에 징검다리에 앉아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는 광경을 보기도하고, 백로나 두루미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잽싸게 물고기들을 낚아채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징검다리는 꼭 하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젊고 유능한 직원인 A가 있었다. 비록 업무는 나와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한 사무실에 있다 보니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A는 바쁜 업무중에도 승진시험을 위해 퇴근 후 대학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도 했다. 그래서 동료 직원들은 “저 친구 저렇게 열심인 것을 보면 바로 합격하겠는데”하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A는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A를 옆에서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던 차에 필자가 보은으로 전근하면서 자연스럽게 A와 멀어지게 됐다. 어느 날 우연히 A가 생각나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더니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갔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의 말에 의하면 A가 계속해서 승진시험에 실패하자 한동안 우울해 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근을 요청하더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그 옛날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시험에 떨어져 봤기에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승진시험에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올 때 아내와 아이들 보기 창피했고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 아플까? 그리고 자존심은 그 얼마나 상했을까?” 낙방 때의 필자의 심정과 함께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의 글을 써서 A에게 보냈더니 얼마 후 감사의 편지가 왔다.

우연이 직원 결혼식에서 A와 함께 근무하는 직원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A의 안부를 묻게 됐다. “그래, 그 친구 요사이도 열심히 근무하고 있죠?” “예에, 한동안 방황을 하더군요. 아마 전직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승진 시험에 낙방을 하니 모든 일에 의욕도 떨어지고 또 자존심도 상했나 봅니다.” “그래요? 참 유능한 사람인데….” “지금은 아주 열심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참, 지부장님께서 편지를 써 주셨다면서요? 그 친구 이야기로는 그 편지를 코팅을 해 놓고는 마음이 혼란할 때나 의욕이 떨어질 때면 읽어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더라, 그 편지를 희망의 징검다리라고 하던가? 본인과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연결하는 그런 징검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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