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기계공고 정문 옆에 4·19혁명 진원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이 설치되기까지 50주년이 흘렀다.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관권, 금권, 폭력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저질러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봉기로 촉발됐다. 4월 11일 마산 시위에서 실종됐던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체가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돼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노도와 같은 의거가 재차 일어나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그 당시 청주대학교에서도 1960년 4월14일 김현수, 박종희, 오세억, 박상기, 박신영, 이종현, 방한명, 권인식, 심만보 등 학생회 간부들이 몇 차례 회의를 해 4월 18, 19일에 규탄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청주시내 7개 고등학교(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청주농고, 세광고, 청주여고, 청주여자기고)학생회 간부를 설득했다.

4월 18일 월요일 청주공고 학생 500여명이 오성섭, 김영한 등의 진두지휘로 당시 청주역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김주열군의 사인을 규명 하라’ ‘3.15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중앙시장을 거쳐 성안길 방향으로 내달았으나 경찰에 강제 해산됐다. 청주공고 학생들은 4·19혁명의 선봉에 서서 규탄시위를 하면서 학생시위의 선도적 역할을 다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청주가 서울, 부산, 대구, 마산과 함께 4·19혁명의 5대 진원지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독재자의 주구들은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186명의 고귀한 생명이 산화했으며 6천400여명의 중경상자가 4월의 민주광장에 선혈을 뿌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쟁취한 4·19혁명은 제2공화국에서 혁명으로 정의돼 국가 정책으로 자리매김했으나 민주정권을 총칼로 탈취한 5·16군사 정권은 4·19를 의거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4·19를 지워 버리는 등 4·19는 영욕을 거듭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문민정부에 들어와 4·19는 혁명으로 정의돼 헌법 전문에 명기됨으로써 명예를 되찾았으며 2000년 12월 4·19혁명 공로자를 국가 유공자로 예우하도록 법률에 명시했고 정부가 기념일로 정해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한 동지들이 있어 안타깝다.

청주가 4·19혁명의 5대 진원지였으면서도 혁명 50주년이 지나도록 기념탑과 시발지 표지석을 설치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해 오던 중 김현수 전 시장이 4·19혁명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활동해 민선 4기 당시 충북도와 도교육청, 청주시에서 각각 1억원씩 3억원을 지원 받아 상당공원에 4·19혁명 기념탑을 전국에서 제일가는 탑으로 건립했고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당시 학생 시위의 시발지였던 청주기계공고 정문 옆에 설치했다.

4·19혁명의 50주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에 우리의 숙원이 이뤄져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과 이념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한 단계 다가서게 돼 가슴 벅차 오르는 감회를 금할 길 없다.

아직도 4·19혁명을 완성되지 않았다. 필자의 생전에 4·19혁명기념사업회의 회관 건립과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 재단을 설립,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과 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돼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지고 남북통일이 되는 그 날이 4·19혁명의 자유, 민주, 정의의 정신이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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