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달력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나갈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마지막 한 장만이 달랑 남아서야 떨어진 11장이 문득 생각이 났다. 어디로 갔을까? 이리 찾아보고 저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있으려다 우연히 본 거울 속에서 그들을 모두 찾아냈다. 한 장은 내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고 또 한 장은 나의 턱 살에 붙어선…. “아하! 이놈들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며 박수를 치니 옆에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 눈이 왕방울이 된다. 그러고 보니 세월의 무게는 아내의 얼굴에도 잔 굴곡으로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하기야 세월의 무게가 인간에게만 있겠는가. 600년 세월의 무게를 그리도 잘 견디던 정이품송도 근래 들어 4차례에 걸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이미 7∼8개 가지가 부러졌다. 또 병에 대한 저항성도 약해져 솔잎혹파리에 감염되어 링거까지 맞았으니 세월의 무게는 삼라만상 모두에게 해당되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속리산 정이품송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둘째 형님과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함께 법주사를 갔었고 그 중간에서 정이품송을 보았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엄청난 소나무의 크기에 내가 놀랐었고 또 형님이 전해주신 정이품송의 전설을 들으며 어떻게 저 큰 가지가 임금님 가마가 걸릴까봐 스스로 위로 움직였는가 하며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좀 더 세월이 지나자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신경초‘라는 풀이 사람 손이 닿으면 스스로 입을 접고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을 보면서 아마 저런 원리로 정이품송도 가지가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든 2010년 끝자락에 강풍에 의하여 정이품송 가지가 또 부러지는 수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침부터 괜스레 가슴이 아리며 병환 중에 계신 둘째 형님 생각이 났다. 작년부터 숨이 찬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연세가 드시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몇 달 전부터는 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셨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각하고는 서울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목뼈 이상으로 인해 그러니 주사 몇 번만 맞으면 된다고 하기에 모두들 안심했다. 그러나 형님은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도 계속해서 통증을 호소하셨다. 혹시나 호흡기 내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폐암’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통보를 받게 됐다. 형님은 한 동안 정신적인 쇼크를 받으셨는데 시간이 자나자 어느 정도 안정도 되찾으셨고 치료방법에 대하여도 강한 집착을 보이고 계신다.

“동생, 나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지? 그러나 어떻게 하겠어. 자식들은 모두들 객지에서 살고 있으니 급하면 막내 동생을 찾을 수밖에…”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늦둥이인 나에게 형님과 누님들은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으시다. 이제까지 사랑을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내가 그분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형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암세포도 형님처럼 나이가 들어 힘이 없다고 하니 살살 구슬리기만 하면 오래 오래 사실 수 있대요. 암을 이기려고 생각하지 말고 함께 동행한다고 생각하시며 지금과 같이 사시면 되요. 그리고 형님! 우리도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것 알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죽음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살았을 뿐이지….”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형님은 머리를 끄덕이신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돌아 가셨으니 이젠 우리 차례지.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살았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건데. 동생! 너무 조급증 내고,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 지금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후회가 돼. 가만히 있어도 그냥 다 지나가는 것을, 그것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형님의 말속에서 나는 또 한 번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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