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세계 어느 나라 문자보다도 가장 과학적으로 창안된 소리글자이며 소통수단이다.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은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창안 주도에 대해서는 정의공주를 비롯해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 과학기술자 장영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세종실록’에 의하면 백성을 위해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에 세종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 9월 29일에 반포한 것으로 돼있다.  

반대세력 피해 청주서 한글창제

세종은 성운학(聲韻學)에 능통했지만 어문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세자와 싱크탱크인 집현전 학자들만으로 구성된 한글창제 TF팀을 가동시켰다.

그래서 일설에는 세종 26년(1446) 1차 3월 초에서 4월말(58일), 2차 윤 7월에서 9월말(59일)까지 두번에 걸쳐 117일 동안 서울을 벗어나 청주 초정행궁에서 안질과 피부병을 치료하면서 긴밀히 한글창제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세종이 머물렀다는 청원군 북이면 선암1구 주왕이 마을 서북쪽 기슭에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소였던 서당골에서 와편이 발견되기도 한다. 

세종의 초정행차에는 한글창제 TF팀이 당연히 호종했으며, 6조와 행차 관련부처 소헌왕후, 세자(문종), 세손(단종), 진양대군(세조, 1차 행차만 호종), 안평대군, 영흥대군,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 등 주요 정부 조직은 물론 왕족과 종친들이 함께 수행했다.

당시 서울에는 일부 대군들과 영의정 황희와 소수의 대신들에게 국정을 위임한 후 초정리 임시수도에서 한글국책 사업에 주력했다.

초정 1차 행차에는 후에 단종이 되는 당시 6세의 세손이 행차를 했는데 세종 23년(1441년)에 태어난 후 2일 만에 죽은 세자빈(현덕왕후)을 대신하여 세손을 돌보았던 본관이 청주인 세종의 4번째 후궁 혜빈양씨 또한 같이 왔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등 정사에는 세종 26년(1444)에 한양을 출발(2월 28일)하기 전인 2월 20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올린 정음 반포 반대의 글에 의하면 “정사를 의정부에 맡기고 시급한 정책도 아닌 언문을 임시 행궁에 가서도 서둘러 만듦으로써 임금께서 몸을 조리하심에 방해되게 하십니까?”라는 사실로 보아 초정리에서 한글창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이 머문 기간 동안 한글 관련기록이 보이지 않고, 박팽연의 ‘박선생유고’와 하연의 ‘경재집’ 등 집현전 학자의 문집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한글창제 초고의 마무리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을 따라 초정리까지 호종한 집현전 학자들로 구성된 한글창제 TF팀에는 좌찬성 하연, 부교리 박팽년, 행집현전(行集賢殿) 부수찬 이개, 집현전 응교 최항을 비롯해 안평대군, 좌부승지 황수신, 집현전 부수찬을 지낸 좌부승지 이사철,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당시 충청도관찰사 김조, 판사 정연, 도승지 이승손, 수찬 성삼문, 성삼문의 조부 판중추원사 성달생은 1차 행차 때 초정리에서 급사했다.

집현전 학사는 아니지만 청주와 관련 있는 세종의 행차에 호종한 인물로는 수양대군의 사돈이자 병조판서인 한확이 있다.

집현전 학사로 충북과 관련있는 인물로는 음성 출신의 유성원, 옥천 출신의 김문기, 괴산에 묘지가 있는 정인지, 청원군 가덕에 영당이 있는 부교리 신숙주, 옥천 출신의 남수문, 괴산 출신의 2차 행차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허후 등이 있다. 또한 청주 출신은 아니지만 같은 시기 약수가 발견된 전의 출신의 박팽년 부친 박중림도 청주에 호종을 했다. 

특히 이승소는 당시 25세의 나이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을 따라 호종하면서 ‘초수’ 와 ‘초수부’를 쓴 시인이자 후에 집현전 박사를 지낸다.

한글 관련 다양한 콘텐츠 구축 필요

이승소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훈민정음을 빨리 체득하여 한글편찬 작업과 번역 사업에 적극 가담한다. 그밖에 정인지와 함께 ‘훈민정음’ 서문의 범례를 지은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 이선로 등도 행차에 참여하여 당연히 한글창제에 가담했을 것이다.

신미대사는 세종이 자주 입궐하게 하여 불경을 듣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체계를 자문하도록 했을 정도로 세종의 총애와 진양대군(세조)과도 교분이 가까웠다. 그

런데 세종이 초정리에 머물면서 훈민정음을 연구할 적에 행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속리산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도 집현전 학사(영산김씨 족보기록)로 발탁되어 참여했을 것이다. 

세종이 초정리에서 한글창제의 국가사업을 시행한 역사적 사실은 인쇄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고인쇄문화의 중흥지 청주는 ‘직지’ 우상화의 이데올로기에만 연연하지 말고 고인쇄에서 한글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구축한다면 특화 브랜드로서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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