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교감(交感)’이다.

교착점(交着點)엔 설렘과 기쁨과 행복과 그리움, 선(善)한 것들만 존재한다.

신뢰는 ‘소통(疏通)’으로 잉태한다. 소통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고 왜곡되고 변질되기 마련이며, 불신과 대립과 이질화(異質化)를 초래한다.

세상은 공유하는 공간이다. 양보하고 이해하고 타협하고 절충하지 않으면 소외되고 다투고 저항하고 분열된다.

공동체. ‘세상 속 세상’이다.

공동체를 유지케 하고, 발전케 하고, 성숙케 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관점과 방법론과 접근가치의 소통과 신뢰다.

그러지 못하면 내부의 붕괴 속에서 외형만 유지하는 ‘박제(剝製)’일 뿐이다.

요즘 충북도와 충북도의회를 바라보면 교감과 소통의 부재(不在)를 인식하게 된다.

민선5기, 충북도의 화두는 ‘함께 하는 충북’이다.

그 가치를 실현하는 촉매는 신뢰와 사랑이다.

신뢰와 사랑의 모태

‘함께 하는 충북’을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주동력체인 공조직의 소통과 교감이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최근 충북도 공무원들 사이에선 소통과 교감보다는 불신과 부동(不動)이 감지된다.

조직개편이 대표적 사례다.

조직개편은 조직이 추구하는 목적과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효율적 운용을 위함이요, 이를 위해선 조직원들의 이해와 참여를 먼저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조직개편을 앞둔 충북도 내부에선 침체와 저항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조직원들의 의견과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일방적 추진 때문이다.

조직개편의 필요성과 시급성이 당위(當爲)를 갖는다면, 소통과 교감을 통해 조직원들의 동의와 이해를 먼저 구해야 한다.

행정의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행정의 동력인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교감하지 못한다면, 조직개편의 목적과 가치는 퇴색되고 표류할 뿐이다.

미국 사회 리더들의 모임인 파워네트워킹 컨퍼런스(PowerNetworking Conference)의 설립자이자 사업가인 조지 프레이저(Georg
e C. Fraser)가 가장 중시하는 원칙과 철학은 ‘소통과 교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통감(通感·소통과 교감)-소통과 교감을 위한 인적 네트워킹 기술’을 통해 말한다. “인생의 목적을 꼽자면 어떤 일에 사랑을 주고, 봉사하고, 베풀고, 가치를 더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먼저 줘야 한다. 뭔가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말을 건네면 그 친절함이 더 크고 좋은 방식으로 되돌아온다”고.

그는 또 “마음은 색깔이 다양한 낙하산과 같다. 쫙 펼치면 정말 아름답고 강력하다. 마음을 열면 한결같은 성취, 즉 변화를 가져다준다”라고 강조한다.

행정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랑을 주고 봉사하고 베풀고 가치를 더하는 것이다. 행정은 특정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양한 색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무언가를 얻으려면 먼저 줘야 하고”, “색깔이 다양한 낙하산을 쫙 펼치면 정말 아름답고 강력하다”는 그의 말은 행정의 리더들이 천착해야 할 교훈이다.

이것이 곧 소통이며 교감이다.

도의회 역시 다르지 않다.

도의원들이 변화된 의회를 만들려고 한다 해도, 방법론에 있어서 소통과 교감이 단절돼 있다면 그들의 의지는 독선과 강요로 인식되는 오해를 낳게 된다.

월권 논란 속에서 사무처 조직개편을 추진하고, 파벌조성 논란을 빚으면서 몇몇 의원들의 폐쇄된 모임을 만들고, 존립가치와 책무를 외면하면서 정치적 태생(胎生)에 치중한다는 객관적 비판을 “오해요, 왜곡이요, 편견”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해와 불신만 더욱 깊어짐은 당연한 이치다.

자성과 이해가 전제 조건

언론의 비판적 보도에 대해 “왜 그럴까. 우리의 어떤 의식과 관점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을 개선하고 변화시켜야 하나”라는 자성보다는 “무슨 의도를 담고 있나. 왜 언론이 사사건건 간섭하나”라는 ‘소아적(小我的) 판단’만 고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통과 교감 부재의 책임을 각성하기보다, 보좌하는 사무처 직원들의 소극적 대응으로 전가하고, 언론의 의도적 비판으로 왜곡한다면 그들에게 가졌던 기대와 희망과 관심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다.

기대와 희망과 관심을 거둬들이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관심’이 유일하다.

대의기구(代議機構)인 도의회가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존재가치의 뇌사(腦死)’를 의미한다.

현재까지의 실망은 변화 속에서 수반되는 시행착오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소통과 교감으로 사랑과 신뢰를 공유하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은 유효할 수 있다.

‘함께 하는 충북’이 박제된 표어가 아닌, 충북도와 충북도의회 속에 생동(生動)하는 영혼으로 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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