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코 상을 만나러 서울 가는 길이다. 몇 달 전, 12년 만에 우리는 통화를 했다. 그 후 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요시코는 금방이라도 이슬을 내려놓을 것 같은 크고 깊은 눈을 가졌다. 참 선한 얼굴이어서 그녀 앞에 서면 나도 동화돼 순한 양이 된다. 이런 친구를 나는 잊고 살았다. 사정이야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그녀와 인연은 남편의 일본 유학시절 국제교류 관계로 시작됐다. 공무원과 뜻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국제 교류원들은 유학생들을 찾아가 어려움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내 기억으로 처음 도움 받았던 것은 세간 살이었다. 집에서 쓰던 물건과 아이들이 입다 작아진 옷들을 가져다주며 혹시 내가 마음 상하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당시에도 원화와 엔화차가 많이 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됐다. 교육문제, 복지시설 이용 방법, 의료보험에 관련된 사항 등 타국에서 혹여 불편하거나 외로움에 젖지 않을까 싶어 우리의 손과 발, 친구가 돼 줬다. 나는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그들처럼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市)와 내가 정착할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는데 힘을 다하자고 약속도 했다.

학위를 마치고 캐나다로 가면서 나는 그들과 작별을 했지만 연락을 못한 것은 나였다. 그러던 올 초 어느날 12년 만에 그때 그들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국제 교류원으로 일본에 온 한국 사람에게 우리가 보고 싶다고 수소문한 끝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교류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이 마침 서울에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공무차 한국에 온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녀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만났다. 요시코는 우리를 보는 순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때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들은 자라 대학생이 됐고 우리는 여전히 반가웠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고궁을 돌며 그간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찻집에 앉아 그녀가 선물을 주는데 나는 울컥했다. 일본을 떠나기 전 아사히신문에 내 고향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신문을 오려서 정성스레 스크랩해 갖고 온 것이다. 나는 인사동에서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수예품과 신발을 선물했다. 그녀나 나나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걷다보니 다리가 아파 똑같은 신발 두 개를 사서 신고는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내가 일본에서 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을 대하는 그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외국인을 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외국인 거주자가 백만이 넘어서는 시대에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아직도 미온적이고 때로는 냉담하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정서적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국제화시대에 부응하는 우리의 의식변화가 필요하다. 타국에서 받았던 따뜻한 정을 이젠 나도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고마워요. 눈을 뜨게 해준 요시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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