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마을엔 오래된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다.

강 건너 맞은편에는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은 태화산의 물줄기가 굽이쳐 휘돌고 남한강의 절경 북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농촌. 이처럼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이 마을 뒤편 동굴(곡계굴)에서는 아직도 그치지 않는 피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12월 12일이면 집집마다 정성을 다해 제사상을 차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있다.

6·25전쟁 당시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부모와 형제, 친구의 넋을 기르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혼들은 아직 구천을 떠돌며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51년 1월 20일.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을 가지 못한 이곳 영춘면 주민들과 강원도 영월군 주민 등 400여명은 피난을 가다 길이 막혀 이곳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밤을 지샜다.

다음날 오전 10시께 미군비행기가 굴 주변을 선회했다.

굴에 숨어 있던 주민들은 아군인 미군 비행기임을 확인하고 안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후 비행기 4대가 갑자기 곡계굴을 향해 집중 폭격을 가했다.

이에 주민들은 흰옷을 흔들어 피난민임을 알렸지만 비행기의 폭격은 계속됐다.

이날 굴을 향한 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은 16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 폭격으로 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주민 360여명이 불에 타죽거나 질식해 숨졌다고 생존자 엄한원씨는 주장했다.

이것도 모자라 비행기는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 집중사격을 해 됐다.

더욱이 미군은 굴을 향한 폭격과정에서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네이팜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충격을 줬다.

‘네이팜탄’은 월남전에서 사용한 폭탄이다. 이 폭탄은 휘발유에 나프텐, 팔미데이트를 혼합해 만든 것으로 3천도의 고열을 낸다.

폭탄이 떨어지는 반경 30m이내는 불바다가 되고 이 일대 산소를 고갈시켜 사람을 타죽게 하거나 질식해 죽이는 살상무기다. 미군은 한국전쟁 중 무려 3만2천여t의 엄청난 량의 네이팜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작전명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예천, 강원도 영월 지역을 대상으로 한 ‘싹쓸이(wiping out)’로 단양과 예천사이 지역 75%를 초토화 시켰다.

이같은 사실은 2007년 4월 AP통신이 미국의 해제된 문서를 통해 1950년 1월 20일 미군 전투기가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피난민을 향해 ‘네이팜탄’을 투하해 이 굴에 있던 피난민 300여명이 사망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동안 한국전쟁 중 미군의 네이팜탄 사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이어 AP통신이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 현장 6곳의 희생자 수는 충남 아산 둔포(300명)와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반세기가 흘렀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 민족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6·25전쟁 중 야만적인 학살문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논리로 방치하거나 애써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유가족들은 대미 관계 악화를 우려한 정부를 미워하면서 혹시나 빨갱이로 몰릴까봐 50여년간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 왔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법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법치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문마저 가지게 했다. 다행히 2006년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단양 곡계굴 학살사건에 대해 조사가 시작됐다. 위원회는 생존자와 유족들을 대상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고 현장조사도 벌였다.

또 사건현장의 구체적인 사실관계 등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검증 체증활동과 유해 발굴 등 증거물도 수집했다. 하지만 조사가 시작된 현재까지 명예 회복 등 정부의 조치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명박정부 들어 양민 학살사건 진실을 규명하겠다던 단체들의 연락은 끊긴 상태다.

유족들은 명예회복과 보상은 커녕 군사정권 시절 악몽이 되살아 난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진실위가 조사결과만 발표한 뒤 아무런 후속조치 없이 진실을 밝혀줄 진실위가 없어진 것이다. 위령사업을 추진키 위해 단양군이 제정하려던 조례는 ‘선례가 없다’는 충북도의 거부로 무산됐다.

곡계굴 학살사건 생존자(10명) 대부분은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부모와 형제의 명예회복을 위해 군사정권이 종지부를 찍은 뒤부터 10여년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유족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멍만 들게 한 것이다.

역사는 과거지만 현재와 늘 통한다. 은폐된 사건을 그대로 방기하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역사가 과거사실의 재구성이라면 과거사 복원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될 순 없다. 정부는 적극적인 개입으로 하루빨리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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