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귀농

잔디도 심고, 과수도 심어야 할 것이다. 전원주택은 3,4년쯤 뒤에 짓는다고 쳐도, 집 주위에 울타리를 할 사철나무를 심는 것은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은 세월이 필요하다.

“뭐하시는 분이세요?”

“호구조사 나왔어요?”

“남자 손이 너무 고와서 그래요.”

춤판에 갈 때마다 듣던 소리였다. 여자들이 자신의 손을 잡고 물어보던 질문이었다. 그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농사일을 하면 투박한 농사꾼 손으로 변할 것이다. 춤판 생각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정현!’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낼까? 오늘도 어딘가를 헤매며 먹이감을 찾고 있을 것이다. 한 때는 그녀를 못 잊어 애를 태웠다. 전화벨소리가 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에게 난 한 마리의 먹이감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춤판은 지뢰밭처럼 위험한 곳이었다. 무사고로 춤판을 은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먹고 먹히는 야생의 세계를 빠대고 다니면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은퇴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덫을 놓고,  올무를 숨겨두고 먹이가 걸려들기만을 바라는 사냥꾼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맨 처음 그곳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새로운 먹이 감이 나타났다고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사냥꾼들의 집요한 추적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런 아사리 판에서 더러 할 키고 상처는 받았지만 결정적인 사고는 없었다. 무사고로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사에 다니면서 익혀둔 감각으로 적절히 대응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돌아온 항해사처럼 안도감이 든다. 얼마 전부턴 그런 생각이 부쩍 들었다. 여기저기서 만난 여자들이 다 수상해 보였다. 무슨 해코지를 할 것 같은 예감으로 불안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률이 높은 편이지만 별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축구는 시작할 때 5분과 끝날 때 5분을 조심하라고 했다. 마지막 5분을 버티지 못해서 승부가 엇갈리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무슨 일을 했던지 간에 시작을 했으면 끝을 알리는 행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은퇴라고 한다. 뺑이들에겐 그것마저 없다. 노장은 말없이 살아질 뿐이라고 했으니 뺑이도 그저 사라질 뿐이다. 갑자기 설악산의 한 자락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경관이 수려한 계곡이 나타난다. 다 왔다는 신호다.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금방이다. 갑자기 휴대폰 소리가 난다.

“오늘 온다고 하더니 안 오는 거냐? 선생 기다리느라고 점심도 굶고 있잖아.”

그 친구다. 얼핏 따지는 듯한 목소리지만, 불알친구끼리만 통할 수 있는 농담이다.

“내가 거기 간다고 했던가?”

“오늘 온다고 안 했어?”

차는 어느새 그 친구 농장에 도착해 컨테이너 앞에 선다. 낯선 화물차를 알아 볼 리가 없다. 친구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따져 묻는다.

“네가 온다는 말만 믿고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말이 농담이었단 말야?”

이쯤서 풀어주지 않으면 막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이라도 가면 될 거 아냐?”

창빈이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그때서야 알아보고 깜짝 놀란다.                               

  <끝>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