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귀농

창빈은 평소대로 아침 6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행동은 평소하고 좀 다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으레 거실로 나간다. TV를 켜놓고 소파에 눕는다. 눈을 감고 귀로 뉴스를 듣는다. 뉴스를 들으면서 오늘의 이슈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면서 오늘은 무슨 사설을 쓸까 궁리했다.

그게 오래된 습관이다. 이런 습관은 몸에 배어서 신문사를 퇴직한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도 7시 아침뉴스가 끝나야 소파에서 일어난다. 신문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볼일을 보면서 신문을 읽는다. 머리까지 매만지고 나서 식탁에 앉는 시간은 정확히 8시다.

빨라야 5분 늦어도 5분이다.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출근하는 생활을 수 십 년 동안 했다, 신문사를 퇴직하고 나서부터는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신문을 들고 소파로 간다.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의 신문을 정독하자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9시30분까지 신문을 읽고는 뉴스를 보며 막막함을 달래곤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다. 아침만 먹으면 무조건 집을 나서던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창빈이가 온종일 집에 쑤셔 박혀 있어야 한다는 건 고역이다. 그 고통을 이기지못해서 습관적으로 외출준비를 했다. 아침마다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정처 없이 집을 나서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그게 벌써 몇 년째인가?’

무려 십년 세월이 흘렀다. 어떤 날은 아무런 볼일도 없으면서 서울이나 부산을 다녀왔고, 또 어떤 날은 살 책도 없으면서 책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인근 도서관에서 정기간행물을 뒤적이기도 했다. 이런 백수생활을 통해서 체득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려운 때일수록 친했던 사람은 찾지 말라는 교훈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마저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 알던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편하고,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고향보다는 아무도 몰라보는 객지가 좋았다.

서울역이던, 고속버스터미널이던 나를 알아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다. 추운 겨울만 아니라면 아무 데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좋다. 그것마저 시들하면 흘러가는 구름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얼굴 붉힐 일은 없다.

고향에서는 이런 자유마저도 없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 것도 못한다. 결국 백수 생활도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공원이던 대합실이던 아무 데서든 체면 불구하고 자신의 몸뚱이를 편히 눕힐 수 있으면 좋겠다. 60대 후반쯤은 돼야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창빈이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젊다. 이 나이에 인생을 다 산 노인이나 노숙자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팔팔하다.

‘아직 때를 못 만나서 그렇지….’

지금도 기회만 온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가슴 속에서 꿈틀 거리고 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그 막막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몇 년 만에 가벼운 설렘을 느끼고 있다. 아침을 먹자마자 소파로 간 창빈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 10분 만에 신문을 읽어치운다.

신문을 읽는 게 아니라 대충 훑어보는 것이다. 아내는 요즘 이상하게 바쁜 남편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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