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부 도피

윤활유가 없는 차가 한낱 쇳덩이에 불과하듯이 아내라는 윤활유가 없는 가정도 합숙소에 불과하다. 버스는 청주시내를 벗어나 피반령 고갤 넘고 있다. 아내와 약혼을 하고 첫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어딘가로 가긴 가야겠는데 마땅치가 않아서 무조건 탄 버스가 속리산 가는 차였다.

그때 이 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이었다. 피반령이라는 고개의 이름부터가 산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타는 듯이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웠다. 울고 싶도록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이상하게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

‘그게 다 운명을 예감한 때문이었을까?’

처음 본 아내는 곱게 물든 단풍처럼 예뻤다. 세상물정 모르는 처녀를 데리고 진창이가 내린 회인은 찬바람만 불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든 곳은 허름한 다방이었다.

“풍차다방이었던가?‘

풍차라는 다방 이름이 산촌풍경과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진창이가 탄 버스는 피반령 고개를 다 올라와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저 밑에 회인이 보인다. 아니, 아내가 보인다.

그런데 풍차다방이란 간판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번듯한 상가가 들어섰다. 다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내처럼 모진 세상에 상처받고 살다가 도태당한 모양이다. 회인을 지난 차가 속리산으로 달릴수록 진창은 자꾸 고개를 뒤로 돌린다.

‘춤만 아니었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진창은 분노를 느낀다. 두 눈을 감는다. 제비조직을 응징했던 일을 떠올린다. 악질이었다. 약자만 골라서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는 놈들이었다. 자신이 아니고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녀석들이었다.

그렇지만 진창이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고양이 앞의 쥐였다.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해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범적으로 행해지는 즉결처분이 효과는 최고였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업주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다.

다소 미안했지만 워낙 파급효과가 컸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효과는 대단했다. 진창이가 춤판에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기가 죽었다. 신나게 놀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찬물을 끼 얻은 듯 분위기가 식었다. 진창이도 모르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튀기가 되게 당했다면서?”

“새알도 그래서 못 나온다는 거야.”

“러브호텔은 병신이 됐다던데…”

누가 어떻게 당했고, 누구는 또 어떻게 당했다는 따위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의적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그를 미화시키는 소문들이었다. 진창이란 사람은 주먹으로는 천하무적이고, 청주는 물론 대전, 서울에서도 당할 사람이 없다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진창은 춤판에서 신출귀몰한 존재로 알져지고 있었다. 진창은 춤판에 좀 더 남아있고 싶었다. 할 일도 많았다. 세상사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주먹의 위력이고, 이것을 조직화한 게 바로 조폭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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