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나라꽃이다. 무궁화(無窮花)는 한자 풀이대로 하면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다.

이에 동요의 노랫말에도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라고 하고 있다. 무궁화는 그 의미대로 꽃말도 은근과 끈기 또는 일편단심이다.

또한 나라꽃이다 보니 무궁화는 주체성, 독립 등의 상징으로 사용돼 왔다.

이러한 무궁화를 나무 전체로 보지 않고 꽃 하나로 보면 아침 일찍 꽃이 피었다가 황혼 무렵이 되면 시들어 떨어지는 단명허세(短命虛勢)의 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나무가 아닌 피고 지는 꽃처럼 되고 있다. 작금의 소고기 문제, 독도문제, 대북 문제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무궁화 꽃과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매년 먹을거리와 관련해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 어패류의 비브리오, 돼지 콜레라, 광우병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복해서 축산업계나 수산업계는 1년에 한두 달은 곤혹을 치르고 소비자들은 혼란 속에서 먹을거리 걱정을 한다. 끓여먹고, 조심하면 된다는 과학적 설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서 한두 달이 지나고 관련 장관의 교체로 다음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모든 것을 잊고 산다.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는 정권 때마다 일본과 일본의 극우 보수단체들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골 메뉴가 되고 있지만 그 때마다 자치단체들은 결의문으로 대체하고 정치인들은 성명서로 대체하고 정부는 무궁화 꽃이 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은근과 끈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피살됐다고 하지만 정부는 북한의 대응만 바라보고, 야권은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무궁화가 피듯이 문제가 나타나야 특별대책반이 만들어지고 여론이 시들해지고, 촛불이 꺼지면 문제는 떨어진 무궁화 꽃잎처럼 사라진다.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가 있다. 술래는 기둥을 보고 눈을 감고 열까지 세는 대신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10개의 글자를 외치게 된다.

술래가 눈을 감고 외칠 때 다른 사람은 술래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된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뒤를 돌아볼 때 움직이게 되면 잡혀서 술래의 손가락을 잡게 되고 다른 사람이 술래가 뒤돌아보지 않을 때 손을 끊게 되면 도망가고 도망가다가 술래에게 잡히면 잡힌 사람이 술래가 되는 놀이다.

언제부터인가 독도문제나 북한 문제는 우리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눈을 감고 외치는 사이에 너무도 가까이 우리에 다가서는 문제가 됐다.

이들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항상 술래가 돼서 그 고리를 끊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 그 것은 우리가 이들 문제를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지 못하고, 이성과 논리가 아닌 감정과 임기응변식으로 봤기 때문이다.

광우병에 대응하는 미국이나 독도에 대응하는 일본, 금강산 관광에 대응하는 북한은 우리가 이들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대응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우리끼리 싸우고, 세계나 상대국에게 소리치기보다는 기둥만 보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를 항상 주시해야 한다. 대마도는 우리 것이라고 감정으로 대응하고, 컵 속에 촛불만 밝혀서 게임에 이길 수는 없다.

금강산이나 개성 관광을 중단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술래를 바꾸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무궁화 꽃은 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다. 피고 지는 꽃이 아닌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를 보기 위해서는 충분한 거름과 병충해 예방이 있어야 한다.

인내와 끈기는 장기적인 목표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듯 나라의 정책에 있어서도 장기적인 비전과 목표 속에서 접근할 때 무궁화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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