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신문에 난 기사를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학교 교사일 때 생활부장교사를 여러 해 한 적이 있기에 학생 사안에 관한 보도는 남다르게 살펴보곤 하는데, 그 날의 두 기사는 다른 때와 달리 내게 오랜 동안까지 남는다.

하나는 수능 성적 비관에 투신자살한 쌍둥이 자매 기사(창원)였고, 또 하나는 수능 후 교실에서 화투치다 타살한 남학생 기사(광주)였다. 나는 학업 성적과 생활 지도는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교육 현장에서 잡아야할 두 마리의 토끼 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두 사건은 이 시대 교육의 자화상을 단적으로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착잡했다.

어쨌든 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두 자매가 괴로움에서 벗어나자고 선택한 그 ‘해방’이 오히려 가족과 친구와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오랜 동안 괴로움의 ‘올무’, 고통의 ‘상흔’이 될 것을 생각하니 그게 화나고 밉고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 누구인들 죽고 싶은 고통과 고민 없이 살다갔거나 살고있는 이 그 어디에 있는가. 다른 종교는 잘 모르지만 예수같은 분도 때로는 우셨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곤 한다. 가끔 등산을 하지만 오를 때마다 힘을 든다. 힘이 드는 걸 오늘 또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짜증도 나고 후회도 되고 같이 오자고 바람잡은 이가 밉기도 하다.

그러나 등산 중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게 하는 한 순간이라도 있다면 그게 바로 등산의 멋이고 맛이고 보람일 것이다. 등산을 하면서 때때로 어느 모퉁이에 잠시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이름 모를 풀이나 나무, 보잘 것 없는 산길과 골짜기가 더없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은 “아, 좋다!”다. 비록 짧은 말이요 때로는 마음에 없는 중얼거림이지만 그게 나와 주위 사람들에게 피로회복제, 격려의 바이러스, 엔돌핀의 메아리가 됨을 나는 경험상 느낀다. 미래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과거의 기억도 중요함을 난 등산을 하면서 많이 체험을 한다. 두 자매도 미래의 불안이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자취를 추억해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등산 중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대학 때 빅토르 프랭클 박사의 로고데라피 (logotheraphy)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태인 프랭클 박사는 매일 아침, 피부가 새파래질 정도로 면도를 하면서 ‘나는 독일군에게 아직도 노동할 만큼 생기있게 보일 것이다. 나는 살아서 가족을 만날 것이다.’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쟁 후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데라피(언어라는 로고스와 치료하는 데라피의 합성어)라는 이론을 그의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소개하였다. 나는 그 책을 읽고부터 등산을 하거나 수업을 하거나 연단에 서거나 모임에 참석하거나 감사업무 출장을 가거나 이렇게 둔필을 쓸 때마다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살 의미와 가치가 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이곤 한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그 쌍둥이 자매와 잠재적으로 자살을 꿈꾸는 있는 이 땅의 아들 딸들에게, 그리고 취직과 진학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나의 두 딸에게 이런 로고데라피를 전해주고 싶다.

내가 헛되이(vainly)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wanted) 내일이었다. (조창인의가시고기에서 따온 말로 내 명함 뒷면에 적어 놓았다)

기사를 읽을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두 자매가 죽기 전에 어떤 로고데라피를 수없이 주고받았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 두 자매의 명복을 빌고 가족과 주위 분들에게 위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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