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집은 무엇 때문에 청원군내수면 형동리 산 30번지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운보는 한일합방이후인 1913년 2월18일 출생하여 일제치하에서 성장한다. 어머니의 유별난 사랑이 아들에게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7살에 장티푸스라는 중병을 앓게 되어 언어능력을 잃고 청각장애를 갖게 된다. 장애를 가진 운보는 그 시대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시절임에도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여 훌륭한 예술가로 키우겠다는 어머님의 정성에 그 시절 유명화가의 문하에서 실력을 키우게 된다.

어머님의 지극정성이 장애를 가진 아들을 오늘날 한국미술계의 거성으로 세계적인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게 했다. 운보의 일생은 해방이후 그의 행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해방전 운보의 아호는 운포(雲圃)였다.

운보는 해방되는 날 포(圃)의 사각 틀을 벗어버리고 (雲圃 ->雲甫)로 변신을 시도한다. 아마도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운보는 해방이후 청각장애인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며 현재의 농아재단, 농아기술학교, 청각장애인협회 등 많은 시설을 세워 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삶을 살아왔다.

운보의 일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이 세상에 말 못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너무나 많아 가슴 아프다며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꿔서라도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며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아픔이라고 했다. 그런 속에서 운보는 어머님의 자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신앙처럼 가슴속에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78년 운보는 청원군내수면 형동리를 찾게 된다. 청주 한씨인 어머니 한윤명(韓潤明)여사의 고향땅이었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신앙처럼 생각하는 어머님의 고향은 어머님처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운보는 형동리에 2만5천700평의 땅을 마련하여 평생의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붙는다.

한국예술의 중심지로 세계로 뻗어나갈 교두보로 청원군 형동리를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운보의 집을 탄생시켰다. 평생 농아와 청각장애인에게 희생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어머님고향땅에 맡기려 한 것이다.

운보는 충청북도에 유명한 문화관광유산을 남겨주고 2001년 1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의 고향이라면 자신이 떠난 후라도 어머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그는 생전에 어머님의 품을 그리면서 사후를 어머님의 고향땅에 맡긴 것이다.

운보의 생활에서 습관적으로 해온 말이 있다. 운보의집은 내가 죽으면 충청북도에 기증하여 충북의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유산상속을 포기하고 재단법인 운보문화재단을 만들어 국가에 기증하여 문화관광부의 관리하에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충북도민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머님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청주한씨인 어머님의 친척들은 운보의집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충북도는 한국의 예술의 중심지로 세계로 나가는 교두보로 만들자는 운보의 폭넓은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오늘 현재 운보의집은 문광부의 관리 소홀과 충북도와 청원군의 나 몰라라 하는 무관심 속에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운영권을 놓고 각종사기행각을 벌이고 있어 무주공산을 실감케 하고 있다.

정부의 지시사항을 코웃음치고, 사법권조차도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도대체 이사회의 정의는 무엇이며 충북인의 정신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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