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들이 교회에 다녀오면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들고 들어선다.

교회에서 간식으로 나눠줬는 데 엄마·아빠에게 줄려고 가져왔다며 해맑게 웃는다.

교회에서 집까진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데, 집으로 오는 동안 큰 개가 샌드위치 냄새를 맡기라도 한 듯 계속 쫓아와 겁이 나서 죽을 뻔했다고 한다.

엄마·아빠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사선(死線)’을 넘은 아이의 자랑스럽고 대견한 무용담(武勇談)이다.

음료수가 미지근하다며 얼음을 넣은 컵에 음료수를 따라주곤 옆에 와 안긴다.

참 행복한 순간이다.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곤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난 행복에 젖어든다.

이제 일곱살된 작은 아이는 우리 집에선 이쁜 ‘딸’로 통한다.

귀여운 말썽꾸러기라 ‘꼬망쥐’란 별명을 붙여준 아들인데 딸보다 더 여우짓을 해서다.

가족은 삶을 지탱케 하는 힘

큰 아이 땐 내가 졌지만,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부를 시켜야 다른 애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애 엄마와 ‘애는 흙 만지고 놀고, 유치원에 들어가서부터 한글을 배워도 늦지 않다’며 치열한 논쟁 끝에 ‘승리’한 내 자녀교육론 덕에 이제 막 한글을 쓰기 시작한 아이다.

그런 작은 아이가 형보다 먼저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 들어가 연필을 들곤 종이에 끄적끄적 뭔가를 적는다.

“뭐라고 쓴 거야?” 물어봐도 배시시 웃기만 한 채 알려주지 않는다.

오전에 일이 있어 나갔던 애 엄마가 들어오자 빨간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종이를 꺼내 놓는다.

거기엔 ‘엄마♡♡’, ‘아빠♡♡’라고 비뚤비뚤 쓰여 있다.

찡한 감동이 날 감싼다.

큰 아이가 선물한 행복에 작은 아이가 건네 준 감동으로 가슴 벅찬 하루를 열었다.

어떤 이는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라고 한다.

삶의 긴 여정엔 기쁘고 즐겁고 멋진 일들보단 험한 질곡과 세찬 파고가 막아서는 일이 많아서일 지 모른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직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남을 음해하기도 하고, 때론 부정(不正)과 불의(不義)와 타협하기도 하며, 가식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기도 한다.

‘혼재(混在)된 정부(正否)의 초상(肖像)’인 셈이다.

그런 삶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 이상과 목표를 담대하고 굳건히 지켜나가려 발버둥치는 힘의 모태는 가족이다.

부(副)와 명예도, 권력과 권위도 궁극적으론 가족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저항의 산물이다.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는 일이 자기만족이자 자아실현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늘 희생하고 헌신하는 배우자에게 보답하기 위한, 자녀들에게 자랑스럽고 당당한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이상과 이념, 논리와 주장이 충돌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교육 분야에서도, 경제 분야에서도 이같은 충돌은 늘 존재하고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족을 생각하면 세상이 변한다

그러나 각 분야의 주체들이 자신의 이상과 논리를 앞세우는 과정에서 가족의 안위와 행복, 희망과 평안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본다면 아집과 독선, 편협과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가족을 위해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내 자녀를 위해 어떤 교육을 해야 할 지, 내 가정을 위해 경제를 어떻게 설계하고 실현해 나가야 할 지를 고민한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답을 찾아낼 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지닌 생각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내 가족을 위한 일인가.

가족, 그 아름답고 소중하고 행복한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이 물음에 당당하게 만점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강건해지며, 희망과 행복이 가득해질 수 있는 법이다. 가족은 세상을 변하게 하는 위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