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1차로 파견된 경로당복지지도사가 근무하기 시작한지 5개월이 돼간다. 경로당복지지도사들이 파견된 뒤로 경로당은 물론 경로당에 출근하는 할머니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죽겠다.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을 경로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뱉던 할머니들이었는데 말이다(변화과정은 다음칼럼에).

경로당복지지도사란 충북도의 ‘2006 여성희망일터 찾아주기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됐던 ‘여성인턴 사업’ 중 한 분야의 인턴이다.

충북도 여성정책관 실에서는 2005년 말부터 여성일자리 창출사업으로 고심하던 중 필자가 제안한 경로당복지지도사(이후 경로당복지지도사) 안을 받아들여 기존의 취업매니저, 방과후 보조교사(에듀케어와 인성교사)안과 함께 경로당복지지도사도 인턴제에 포함됐다.

이 사업을 추진했던 담당직원(고승애)은 이일을 위해 여성부에 교육비지원 예산 출원을 신청, 확정해 놓고 있던 터라 사업을 추진하기위해 우선 충북도와 여성부, 그리고 교육청과 협약을 맺도록 하고 파견된 인턴의 인건비 지급을 위해 다시 한번 지자체의 예산확보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확보된 예산으로 막상 사업을 추진하려하니 각 분야별 인턴 교육생을 선발해서 교육시키고 현장에 파견하는 일까지 산더미 같은 일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져 2006년 여성 희망일터 찾아주기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돼 취업매니저, 에듀케어, 경로당복지지도사가 파견됐다. 예산관계로 교육이 끝난 4월 1차로 일부 파견됐고, 나머지 인턴들은 7월부터 일이 시작됐다.

이 모든 일이 여성정책관실 고승애 담당직원의 헌신적이고 혁신적인 노력으로 이뤄졌고, 여기에 여성인력개발센터가 교육의 모든 업무를 분담했기에 가능했다.

경로당복지사의 직업이 창출되기까지 전개과정을 설명하려하니 부연설명이 너무 길어졌지만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경로당복지사의 경로역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2004년 충북도 여성발전센터(당시 여성회관)에서는 고령화사회에 걸맞는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버시터(Silver Sitter) 반이 신설됐고, 역시 필자가 교육프로그램을 짜는데 협력 및 교육을 담당했다.

2004년과 2005년에 1, 2기생이 배출되고, 이들을 합친 심화과정을 거쳐 인재를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2006년 여성인턴제와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경로당복지를 위해 착안해 온 것이다.)

당초계획은 실버시터(Silver Sitter)였는데 외국어사용을 피하기 위해 경로당복지사로 전환, 이것 또한 사회복지사와 갈등소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돼 경로당복지지도사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각종 업무는 복지사의 업무를 능가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 필자는 경로당복지사로 칭하고 그렇게 명명돼 시정되길 바란다.

과거 전문직을 지녔던, 또한 고학력의 커리어를 지닌 고급인력이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도록 장을 펴준 여성정책관실의 혁신적인 마인드와 추진력에, 정책을 제안했던 필자로서는 감격의 올 한해를 보내고 있다.

덕분에 여성부장관상을 수상했지만 그보다도 28명의 경로당복지사들이 경로당 현장에서 근무하며 제2의 직업, 제2의 인생을 살게 됐고, 부수적으로 10여곳 100여명 경로당 할머니들의 삶의 질을 높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 감격의 현장이야기는 다음의 칼럼에서 연재하도록 하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