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여.

오늘 아침은 그동안 미뤄왔던 청갓을 심었습니다.

얼마 전에 모종한 가을배추는 이제 흙내를 맡고 마치 팬지꽃처럼 오종종 아버지 밭에 안착했습니다.

다음주엔 누이를 따라 재 넘어 송이투어에 나설 볼 참입니다.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날을 세우고 서늘하게 감겨옵니다.

마음껏 부풀어오르던 산들은 이제 더 이상 몸을 뒤채지 않습니다.

다만 나처럼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김수영’의 풀잎처럼 흔들립니다.

오늘은 벌초데이였습니다.

연례행사처럼 우리가 꼭 치르고 가는 우리들의 축제입니다.

이 곳 씨앗골도 하루종일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삼촌을 부르고 형수를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고….

온산에 가득한 ‘우웅-’ 거리는 예초기소리에 푸른 수풀 속으로 뽀얗게 반달 같은 산소가 피어오르고 고향 산천도 또렷이 피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은 모처럼 둘러앉아 술을 붓고 절을 하며 산밥을 달게 먹습니다.

돌배를 따고 산밤을 털다 벌떼를 피해 내달리는 모습, 풋대추를 깨물며 우물가 설거지를 하는 아낙들의 낮은 유행가 소리.

이른 갈대를 뽑아 저고리 주머니에 깃털처럼 꽂고 개선행진곡처럼 돌아오는 남정네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

아! 나는 이런 풍경이 좋습니다.

이 지상 그 어느 곳에 이 보다 더 정겨운 가을맞이 축제가 또 있을까요.

이처럼 경건하면서도 왁자지껄하고 슬프면서도 즐거운 행사가 또 있을까요. 이렇게 힘들면서도 더없이 정겹고 즐거운 노동이 또 있을까요.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이 것이 바로 이 땅 한국의 모습입니다. 수 천년 내려온 우리들의 참살이 모습인 것입니다.

이 곳에는 그 어느 세상의 잣대도 없습니다.

온 장을 떠도는 사촌형의 남루한 1t트럭의 고단함도, 제종형의 집채만한 검은색 세단의 빛나는 광택도, 고집스레 고향을 지키는 당숙의 녹슨 경운기 짐칸 누런빛도, 모두가 드높은 하늘아래 다 같은 무늬가 돼 반짝반짝 빛나며 흐릅니다.

그렇듯 이 곳엔 우리가 이렇게 한마음으로 올린 경배의 정성만 있을 뿐입니다.

일가친척들의 넘치는 사랑과 따스한 고향의 넉넉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잔을 올리며 마음으로 되 뇌였던 한가지 간절한 염원들이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돼 우리를 부추길 것입니다.

그대여 .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향에서 편안히 산 밥을 나누며 절을 하고 있을 때 그 뉴스 속의 사람들은 이역만리 ‘시애틀’ 낯선 거리에 머리를 묻고 ‘삼보일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조국의 가을을 떠나 빈 상여를 매고 향두가를 부르며 자본의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상의 묘역에 잔을 부으며 이렇게 간절히 발원합니다.

“조상이시여 이 땅을 지켜 주십시오.

명년 이맘때쯤에는 저 머나먼 시애틀의 땅에서 ‘오체투지’로 몸을 낮춘 가련한 우리들의 친지들이 편안히 잔을 부으며 지난해 하지 못했던 벌초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저 ‘FTA’의 망령으로부터 부디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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