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죽 ‘원흥이’는 죽었다.

‘명암 방죽’이 그렇듯이 ‘원흥이 방죽’ 도 결국 물웅덩이가 됐다.

‘원흥이’는 청정도시 청주의 마지막 보루이자 상징이었다. 뜻 있는 이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지키려 한 이유를 아직도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두꺼비 때문만도 아니고, 잘려나가는 그 녹색 언덕과 들판 때문만도 아니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던 원주민들의 실향 아픔 때문만도 아니었다.

‘원흥이’는 개발지상주의. 밀어붙이기 식의 잘못된 이 땅의 토지·주택정책과 정면으로 맞서 투쟁하고 일궈 간, 이 시각 현재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그 거대한 현재진행형 난 개발과 맞선 도심 속 환경운동의 상징적 표상이었다. 그래서 ‘원흥이’라는 이름은 ‘원흥이 방죽’ 이라는 방죽이름의 고유명사 이전에 우리에게는 하나의 환경용어로 자리잡아있는 또 다른 그 이상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 ‘원흥이’가 장렬히 전사했다.

아니 사람들이 이 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을 때 이미 ‘원흥이’는 사라졌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보라.

우선 수초와 나무그림자 대신 거대한 아파트 콘크리트 그림자가 오염된 황토 빛 물위에 괴물처럼 어른거리고,방죽과 산지를 잇는다는, 이름만 수로인 도랑은 흉측한 돌무덤 같은 모습으로 줄을 긋고 서 있고, 사철 넘실거리며 푸르던 수량은 유입량 부족으로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 채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거북이 등 마냥 갈라져가고 있다. 그 많던 수초와 풀벌레와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새들은 어느 곳으로 날아갔을까.

황토빛 웅덩이 한 켠에 서있는 ‘원흥이 생태공원’이라는 나무 팻말은 보기도 민망하거니와 그 팻말도 스스로 쑥스러운 듯 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

어느 촌부에게 어린 손자가 이 곳에 와서 “할아버지 여기가 생태공원이에요”했더니 그 어른이 “아가야 생태는 바다에 산단다. 생태를 얼리면 동태가 되고 말리면 북어가 되지” 하셨다는 이 곳에 얽힌 웃지못할 실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좀 더 배웠다는, 21세기의 과학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산다는 우리가 그 어른의 환경용어에 대한 무지를 탓하며 웃을 수 있을까.

평생을 농사지으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오신 그 어른들이 남긴 이 자연의 유산을 처절히 살육하는 우리가, 어찌 더 똑똑하고 실용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추하고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무지하고 욕심 많은 우리가 만들어낸 자연의 살육현장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모습마저 잘 보전해야한다. 도심 속 그 푸르고 건강한 산기슭이 들판이, 그리고 두꺼비와 장수하늘소와 파랑새가 살던 그 푸르고 푸른 억겁의 산그늘 청정호수 ‘원흥이’가 어떻게 우리를 원망하며 처절히 스러져 가는지 그 것마저 우리는 우리들 후손들에게 한 점 보탬 없이 그대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궁창이 되든 흙탕물이 되든 콘크리트로 빚은 물탱크가 되든 우리는 이 ‘원흥이’가 한 톨 물도 없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이렇게 참회하며  바라볼 수 있도록 손끝하나 대지말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오늘 FM게시판에 실린 한 애청자의 글은 내내 여운으로 남는다.

“가랑잎이 눈을 가리면 큰산도 보이지 않고 콩알도 귀를 막으면 천둥소리도 못 듣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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