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가 피었다.

지난해 친구네 뒤뜰에서 옮겨다 놓고 까마득히 잊었던 손님이었다.

이 꽃 저 꽃 욕심만 앞세워 좁은 정원에 빼곡이 들여다 놓고는 이내 잊고 지낸 초록친구들이 많다.

상사화도 올 여름 그렇게 내게 왔다.

그는 마치 내 무관심을 책망이라도 하듯 불쑥 푸른 꽃대를 올리고는 유독 몸을 흔들어 바람을 탄다.

몇 송이 여린 홍자색 꽃 봉우리가 초록 융단속에 이방인처럼 일렁이는데 멀리서 보면 꼭 한무리 무희들이 화관무를 추는 모습같다.

상사화.

그렇다 그들은 서로 그리워하다가 결국 한번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피고 진다.

꽃은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고 풀잎은 말라죽은 뒤에 꽃대가 나와 꽃이 피는데 덩그러니 초록막대 같은 꽃대가 잎도 없이 땅위에서 불쑥 솟아 올라 꽃을 매달고 서 있다. 결국 풀잎은 꽃을 못보고 꽃은 풀잎을 보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의 꽃 상사화.

상사화는 사랑하는 남녀의 만남 심부름을 서로 다르게 알린, 주인 남자를 흠모한 어린 몸종의 질투가 빚은 비극의 전설을 담고있다.

이 지상의 모든 꽃은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다. 대개 그 전설은 꼭 죽어야 피고 마는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슬프고 안타까운 전설들이다.

‘며느리밥풀꽃’은 밥몰래 퍼먹다 시어머니 고함에 놀라죽은 며느리의 한이, 바닷가의 ‘해당화’는 어린 동생을 남겨두고 팔려 가는 죽은 누이의 슬픔이. 기다리다 죽은 자의 넋이 꽃이돼 손을 흔든다는 ‘개망초꽃’. 내가 알고 있는 꽃 전설 중 가장 슬프고 애달은 꽃 전설은 ‘등나무꽃’이다.

어느 마을에 두 자매가 있었다.

두 자매는 예쁘고 착했고 서로 우애가 깊었다. 여기저기서 혼사가 들어왔다. 그러나 두 자매는 혼사는 안중에 없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두 자매는 똑같이 그 마을에 있는 한 멋진 청년을 남모르게 사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

청년은 싸움터로 나가야 했다.

두 자매는 흐느껴 울다가 서로의 속마음을 알게됐다. 그러나 청년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전사했다는 소문이 전해져왔다. 두 자매는 너무도 큰 슬픔을 견디지 못해 서로 꼭 껴안고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로부터 얼마 후 청년은 무사히 돌아왔고 두 처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년은 슬픔에 젖어 그 역시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연못가에는 한 그루의 팽나무를 사이좋게 끌어안은 두 그루의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탐스러운 보랏빛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눈물처럼 매달려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신기하게도 사랑에 금이 간 사람들이 함께 그 꽃을 보게되면 서로를 바라보게 되고 다시금 깊은 사랑으로 가까워진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강내’에 사는 내 친구네 집은 비록 누옥 이지만 뜰이 넓고 등나무 그늘이 시원하다.

해마다 등꽃 피는 오월이면 우리들을 초대해 고기도 굽고 술도 마셨다.

몇 해 동안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 집에 가지 못했다.

내년 등꽃 피는 오월에는 다시 그곳에 가야겠다. 그러면 먼길을 돌아와 지친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보랏빛 등꽃처럼 서로를 바라보듯 주렁주렁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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