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칼럼

산 속 한 작은 암자에 다녀왔다.

만뢰산 기슭 연꽃봉우리 같은 능선 속에 산사는 큰 너럭바위처럼 오뚝이 솟아 있다.

온화한 염화미소를 짓고 있는 선승은 잿빛 가사대신 흰 모시저고리 차림이었는데 푸른 산 빛을 받아 그 세모시 청정한 빛이 더욱 하얗게 빛을 발하였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가꾼 사찰 정원은 울도 담도 없이 산 빛을 타고 흐르며 산이 됐다.
경내에는 그 흔한 석탑하나 없다.

주변 돌들을 모아 꾸불꾸불 쌓아올린 소박한 몇 무더기 돌탑만이 바람을 가르며 산에 기대어 서있다.

여름·가을·겨울·봄 마다 찾는 등산객들에게 마음의 이정표가 돼 주기도 한다.

그 돌탑들이 내 눈에는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내 환경정비다.

봉사단 일원으로 가끔 이렇게 사찰 울력을 도울 때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조용한 경내에 날카로운 낫을 들고 또는 ‘붕붕. 예초기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초목잡초를 제거하는 일이다.

앉을 자리도 한번 뒤돌아보라는 가르침이 무색해지는 순간이기도하다.

잡초를 한자로 풀면 ‘잡스러운 풀’이 된다.

‘원치 않는 장소에 돋아난 잘못된 풀?’ 이것이 대체로 잡초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바꾸어 풀어보자 풀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머물고 있는 그곳은 원래 그들이 자연스럽게 바람 따라 뿌리 따라 자리 잡은 그들의 전통 삶의 터전이었다.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우리만의 의지대로 선악을 갈라, ‘너는 나쁜 풀’ 하며 내치고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입장에서 보면 바로 우리 인간이 무례한 칩입자요.

또한 잘못된 잡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작금의 국제정세로 대비해 봐도 그러하다.

미국입장에서 선악을 가르는 도덕적 절대주의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익과 명분을 위해서는 타국의 기존 주권과 개념을 무시하는 일방주의와 오만함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큰 목소리로 세상질서를 말하고 또 ‘신 무역자유주의’를 운운하기에 앞서 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먼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맞서고 있는 그들의 아픔을 진정 헤아려 보았는가! 나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내 이익을 위해 그들을 한 희생양으로 삼지는 않았는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세운 목표를 향해 질주하며 자신들의 행동과 언행을 정당화시키려 애쓰며 산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잡풀들은, 아니 저 자연들은 인간들을 위해 기꺼이 얼마간의 그들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조화로운 지상에서의 삶의 질서와 행태 때문이었노라고 애써 정당화 해왔다.

이제는 더불어 가야 한다.

그리고 먼저 그들의 입장에서 한번 더 보고 생각해 봐야한다.

인디언들이 사는 평화로운 땅에 서방의 침략소리 요란할 때 인디언들은 이런 시를 썼다.

“너희 음악소리는 너무 크다. 너희는 바람의 속삭임이 두려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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