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는 오종종 처마 끝에 즐겁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저녁때가 돼서야 비로서 몸을 풀고 비거스렁이가 되었다. 장대비 같은 성성한 내 마음도 잠시 내려놓았다.

건듯 물안개사이로 저녁바람이 분다.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녹색바람.

한참을 바람 속을 유영하며 나는 ‘박인환’의 시처럼 애써 애증의 그림자마저 벗고 또 벗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 였던가?

세상에서 이처럼 바람을 잘 노래한 시인이 또 있을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무한의 대기가 내 책장을 펼쳤다 덮는다...”

‘폴 발레리’의 이 유명한 싯구는 한국의 시인 ‘남진우’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는 ‘폴 발레리’의 시구를 차용하면서 한술 더 떠 이렇게 노래한바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신바람이 나지 않아도 살아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의 무게를 시인은 그렇게 역설로 노래했다.

이 지상의 삼라만상은 모두 바람이 있어야 산다.

바람에 몸을 흔들어 수액을 끌어올리는 식물처럼 우리도 신바람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새바람이 불어야 마음을 다 잡아 다시 시작 할 수 있고 몸을 뒤척여 생명의 수액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바람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는 힘 찬 에너지가 또 있을까?

오죽하면 ‘바람둥이’일까.

바람둥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마음이 들떠서 큰소리치며 돌아다니는 사람’ 이라고 되어있다. 한계가 있는 사전적 해석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바람은 그런 것이다.

우리를 들뜨고 큰소리치게 할 만큼 넘치는 에너지로 일렁이게 하는 힘.

그래서 바람은 고맙고 소중한 것이지만 잘못 부리면 태풍처럼 것 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어 일을 그르친다. 누가 뭐래도 가장 시원한 바람은 어머니 손 부채바람이다.

한 여름밤 어머니 무릎에 누워 설핏 잠이 드는 고향집 들마루에서의 유년,까뭇 잠이 들고나다가 바라본 어머니의 인자한 얼굴과 솔솔 불어오던 마법처럼 시원하고 달콤했던 어머니의 손부채바람. 아! 이보다 더 시원한 바람이 또 있었을까?

엊그제는 부채전시회에 다녀왔다.

서원대 ‘미래창조관’ 로비에 바람이 가득 일렁였다.

환경운동연합과 서원대가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제목도 근사해서 ‘바람에 실려 온 바람 전’이었다.

오래된 부채, 각양각색의 부채에서 유명작가와 인사들의 그림과 글씨가 담긴 합죽선까지 가득 정겨운 부채세상이었다.  시·서·화의 운치를 바람결에 실어다 주는 그 풍류의 바람을 보며 사람들은 나처럼 어머니의 부채바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시회장에서 이철수 화백이 그림을 그린 부채를 하나 얻어왔다.

판화가인 작가는 모처럼 칼을 놓고 붓을 들어 소나무숲을 그렸다.

소나무숲 그림의 부채로 바람을 내니 솔숲향기 솔솔 불어온다.

나는 부채바람을 일렁이며 어머니 한번 보고 다시 부채바람 일렁이고 다시 보고…. 옆에 계신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신다.

어머니가 곁에 있어도 나는 어머니가 그립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