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1년 동안 일을 해온 미국의 100세 노인 아서 윈스턴이 기차 및 버스의 수리공 및 청소원으로 일하다 10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퇴직해 세상을 놀라게 한 기사가 있었다. 그는 퇴직을 하면서 81년 동안 아내의 사망일을 제외하고는 결근하지 않은 사람답게 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퇴직 후 20일 만에 세상을 뜨게 돼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기의 일꾼’이라는 칭호를 받고, 미국 전 클린턴 대통령은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지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노장으로서의 위대함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안타깝게도 퇴직과 동시에 사망한 것이다.

과거 우리 부모들의 세대에는 환갑을 살면 천수를 누렸다고 했다. 그 부모세대를 생각하며 퇴직 후 어른으로써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때보다 20년 이상 평균수명이 늘어난 오늘날엔 환갑잔치를 하면 이젠 부끄러울 뿐 아니라 환갑잔치를 차려줄 만큼 다 자란 자식도 없어 슬그머니 환갑여행을 떠나는 시절이 됐다.

사람이 몇 살까지 살수 있을까를 예견할 때도 대체로 자신들의 부모의 나이를 떠올리며 수명을 기대한다. 그런데 막상 부모들은 자식들이 예견하는 나이보다 훨씬 더 많은 천수를 누리기를 기대해 부양하는 자와 부양받는 자 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며 오래 살기를 원하는 노인은 많은데 몇 세까지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노인은 드물기 때문에 아서윈스턴의 사망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나라 일본에서는 노인의 인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출산율이 저조해진데다 젊은이들 경제활동 인구가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 종사할만큼 강인하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귀하고 곱게 자란 젊은이들이 청년실업 문제를 겪으면서도 소위 3D직종에 종사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노인의 인력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일본의 기업체에서 80대 노인까지 신입사원으로 뽑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인구구조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고령 인구층을 사회에 끓어들여 생산 및 소비의 주체로 재활용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정년을 연장하고, 연금 수혜 개시 연령을 높이는 등 고령노동자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한때 조기 퇴직할 수밖에 없었던 준 고령자를 다시 불러들여 생산라인의 현장에 다시 서게  하는 일들이 많아진 것이다. 건장한 80대 노인들을 채용하는 곳 역시 과거 그들이 생산현장에서 일했던 그곳에 다시 세워짐으로써 ‘삶의 전장’에 다시 돌아온 노병으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회사에 충성하며 회사에서 일을 하다 죽겠다는 새로운 각오로 일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2차대전 당시 그들이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그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노인들 중에는 진짜 노인이 많다. 진짜노인이라 함은 노인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하며 일찌감치 일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정년퇴직을 하고도 30년이란 세월이 노년으로 남아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그런 노병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에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한 그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해온 노병이 아직도 건재하다. 다만 이 노병을 재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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