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사막을 심으면 잔뜩 먼지만 나온다. 추(醜)하다. 반면에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그런 가슴을 지니고 산다면 자신은 물론 행복으로 충만하고, 남에겐 멋지면서 또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이건 참 아름답다. 퍼시 애들론(percy adlon) 감독이 만든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그걸 메타포로 마치 정교하게 무늬를 짜듯 사막과 바람, 하늘, 카페 그리고 두 여자주인공과 주변사람들 모두를 아주 기막히게 감독만의 독특한 채색으로 그린다. 동시에 애잔한 음악(Calling you)과 스토리로 마르고 조각난 관객의 마음을 햇살 따스하게 깁는다. 참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황금빛 사막이 보인다. 중년의 남자가 서서 오줌을 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지만 발길질하는 장면이 흐르고 자동차가 휑하니 한대 서 있다. 밑에서 위로 검정색 모자가 벌떡 일어선다. 여자다. 그런데 뚱뚱하다. 여주인공의 하나인 야스민(Jasmin 마리안느 제게브레이트)이다. 그들은 부부였다. 하지만 이내 갈라진다. 남자는 사막에 여자를 혼자 두고서 떠나고 여자는 짐가방을 끌면서 먼지가 폴폴 나는 길위로 나선다. 송글송글 땀방울이 여자의 둥근 얼굴에 고이기 시작했다. 만남은 바람의 결과다. 바라지 않는다면 피하는 건 당연한 몫이다. 그래서 야스민은 저만치 오는 자동차를 피해 숨었던 것이리라. 주유소가 보인다. 방금, 바그다드 카페의 부부도 싸웠다. 깡통을 줍는 흑인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브렌다(Breda CCH 파운더)로 실질적인 카페의 주인이다. 여기서 깡통은 텅 비었다. 그건 부부의 애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이콘. 묘하다. 남자는 깡통을 버리되 결코 줍지 않는다. 대신에 여자들은 줍는다. 이런 설정은 남녀의 차이를 심리적으로 상징한다. 야스민도 브렌다도 똑같이 바랬다. 그런데 선택은 달랐다. 야스민은 땀흘림을 선택했지만 브렌다는 눈물을 선택했다. 눈앞에 남편이 없어지길 바라는 순간 두 여자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 장면에서 난 많은걸 생각했다. 1988년에 제작된 영화라지만 새삼 지금에 보더라도 울림이 크다는 건 쉬운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 B는 다른 친구 J에게 전화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했던가. J를 기다리기로 약속한 장소는 호프집이었다. 너 C 알지? 응. 아직도 군인인가? 그래! 근데 걔 중령이야. 그렇구나! 너 C가 바그다드에도 갔다 온건 아냐? 아니, 난 몰랐어! (……) 참고로 얘기하자면 J와 난 자주 만나는 사이다. B와 J도 뻔질나게 만나는 친구다. 그럼에도 난 B와 10년 만에 만났던 것이다. 만약 간판을 보지 않았다면 오늘 B를 그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그다드 카페’란 영화는 또 어떻고. 치과의사 B는 환자의 치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직업, 경제력 등) 과거가 보인다고 말했다. 정말 한 분야에 10년 종사하면 도통(道通)하나 보다.

세상엔 고수가 적지 않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난, 딱 그 짝이다. 영화를 보더라도 관심은 온통 장사로만 기울기 때문이다. 고객이 매출을 장악한다. ‘친구’로 받아들이면 최소한 평균매출이 된다. 또 고객의 체험이 친구에서 ‘신자’로 바뀌게 되면 최고의 매출이 갱신된다. 이게 불변하는 장사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맥주만 팔지 말고 매직도 팔면 안되겠니” 한 개그맨의 인기 버전도 있지만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니”하는 것은 바로 고객의 목소리임을 간과하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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