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꽃, 동자 꽃, 맨드라미….

늦은 꽃씨를 뿌렸다.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서야 이룬 게으른 파종이었다. 울타리 안팎을 돌며 호미질을 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씨앗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다.
내 호미 끝에 걸려 나온 싹 튼 강낭콩 작두콩 씨앗들….

이미 어머니가 한 번 휩쓸고 간 자리에 내가 다시 꽃씨를 들고나선 것이다. 나는 주로 꽃씨를 심고 어머니는 온갖 콩이며 더덕 옥수수 같은 곡식을 욕심내고 아버지는 한 술 더 떠서 산에서 뿌리 채 캐 온 취나물이나 잔대 같은 약초를 주로 심으신다.

올해는 내가 좀 늦었지만 어느 해는 내가 이르게 심은 꽃씨가 파헤쳐지기도 하고 어느 해는 아버지가 정성 들여 옮겨 심은 약초가 잡풀로 오인돼 버려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해마다 우리집 녹색 철망 담장은 그렇게 3인 3색을 띄며 부풀어오르는데 이맘때쯤이면 우리는 모두 나름의 풍경을 그리며 유난히 울타리에 시선을 쏟는다. 올해 가장 나를 가장 기쁘게 했던 새 식구는 도라지와 토란 새 순 이었다.

도라지는 지난해 가을 방죽 아래 있는 남의 밭에서 한 뿌리 몰래 캐 와 깊숙이 묻어두었는데 서너 갈래 선연한 모습으로 싹을 올렸다.

씨앗을 사와 흩뿌려 재배할 수도 있지만 화초 삼아 캐온 것이니 이 녀석으로 서서히 식구를 늘려보는 재미를 볼 참이다.

나는 토란이 좋다. 연꽃잎 같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하늘거리는 녹색 우산 같기도 한 토란잎. 우리들 고향 시골집 뒤란이나 샘물가 또는 밭두덕, 그 어느 곳에나 흔하게 자리 잡아 늘 우리를 푸르른 힘으로 넘실거리게 하는 녹색파도….

지난 가을 직지사 오르는 길 산문입구에서 사온 한 됫박 토란뿌리가 올 여름 새 식구로 찾아와 이렇게 산사의 기운을 띄며 건강한 녹색파도를 일궈 줄 것이다.

씨앗은, 그리고 우리의 땅은 여전히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두고 가꿀 수 있는 희망을 준다. 그러고 보면 씨앗은 세상을 담은 하나의 작은 우주와 다름 아니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출발점이고 순리이고 즐거운 기다림이고 소망이다.

나는 아이들 숙제로 “씨앗을 심고 싹이 트는걸 관찰해보세요” 하는 숙제를 내 주시는 선생님이 좋다.

모바일폰으로 TV를 보고 컴퓨터 바탕 화면에 콩 심듯 라디오를 심어 보고 듣는 멀티미디어 디지털 시대라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먹을거리와 숨쉴 공기와 겨를의 휴식을 주는 세상은 지금 보이는 저 녹색의 푸른 물결, 대 자연인 것이다.

순리대로 철따라 흐르고 피고 지는 저 위대한 자연의 질서로 맺어진 세상인 것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일제 강점기 ‘권태응’선생은 이렇게 짧은 동시를 지어 변치 않은 민족혼을 일깨웠다. ‘등 꽃’ 심은 데는 ‘등 꽃’이 나고, ‘강낭콩’ 심은 곳에 ‘강낭콩’이 난다. 천지가 개벽해도 변치 않는 순리이다.

그 자연의 순후한 아날로그 세상에는 줄기세포 조작도 논문조작도 없다. 아이들 앞에 머리 들기도 부끄러운 이 조작의 시대에 우리아이들에게 정직한 땅심을 보여주면 어떨까?

아파트 베란다 빈 상자에 흙이라도 퍼 담아 강낭콩이라도 몇 줄기 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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