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방학과 동시에 어김없이 만들었던 것이 ‘동그라미 계획표’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정도로 비현실적인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표를 짜는 순간만큼은 진지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기상시간은 으레 오전 6시 아니면 오전 6시반이다. 많이 양보하면 오전 7시. 학기 중에도 일어나기 힘든 기상 시간인 데도 늘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아침운동’도 약방의 감초처럼 꼭 그려 넣고는 했다. 당연히 ‘가족과 대화하기’는 필수 항목이었다. 그러나 방학 첫 날부터 동그라미 계획표는 빛을 잃고 만다. 그 계획표는 그저 방학숙제 제출용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초등학교 내내 반복하고도 모자라 중·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한다는 사실이다. 방학만 돌아오면 ‘이번만은 예외’라는 의지가 ‘매번’생기기 때문이다. 계획의 오류는 고등학교에서 멈추지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좋은 영어 교재가 ‘Word smart'라면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를 강타했던 것은 ‘Vocabulary 22000'과 ‘Vocabulary 33000'이라는 영어 어휘집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당시 대학생들은 방학만 돌아오면 초등학교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의욕과 희망에 넘쳐 ‘Vocabulary 22000' 완독을 위해 전의를 불태우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계획과정을 거쳐갔다. 우선 Vocabulary 22000을 사면 맨 먼저 책의 페이지 수를 센다. 그리고 방학일 수로 나눈다.

그러면 하루에 공부해야 할 페이지 수가 나온다. 순간 회심의 미소가 떠오른다. “하루에 겨우 2~3페이지, 그 까짓 것…”, 그런데 웬걸,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방학한 지 일주일이 지나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또다시 페이지 수를 세고, 남은 일 수로 나누고, 몇 장 안 되는 하루 분량에 안도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방학은 끝나고 만다. 다음 방학이 돌아오면 ‘이번만은 꼭 해내고 말 거야’라며 다시 도전한다. 하지만 지난번 방학 때와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날마다 페이지 수만 센다. ‘Vocabul ary 22000'은 지금까지도 30, 40대에게 끝내 실천하지 못했던 ‘한’으로 남아 있다. 이런 상황은 의지 부족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계획이 비현실적이고 낙관적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계획을 세울 때만 되면, 일종의 ‘슈퍼맨 신드롬’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계획표를 짤 때 낙관적인 이유는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원리 하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원리란 어떤 종류의 의사결정이든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정보뿐 아니라, 부합하지 않는 정보까지 고려한 후에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방학 동안 계획한 책들을 왜 읽을 수 있는지, 왜 읽어야만 하는지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책을 못 읽을 수도 있는지 고려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즉, 계획을 세울 때는 최상의 시나리오와 함께 최악의 시나리오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리는 이러한 원리를 거부한다. 새로운 사업을 계획할 때도 잘 될 이유만 생각하고 실패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주변에서 누군가 걱정하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초치지 말라’며 화부터 낸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는 큰 힘을 발산하지만 계획을 세울 때만큼은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자신의 시나리오에 집중해서 계획을 세우다 보면 온갖 관심이 자기 ‘내면’으로만 쏠린다. 마치 터널 속에 들어가면 터널 안만 보이고, 밖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오직 자기 의지만을 바라보는 ‘터널 비전’ 때문에 늘 낙관적인 계획만 세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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