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긋지긋한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아들이 커서 집을 나가 제각기 삶을 살았다. 하나는 완전한 금주자로서 말끔한 생활을 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자란 그들이 그렇게 대조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똑같았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타락한 아버지 밑에서 착한 아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또 그 아버지 밑에서 그와 같은 아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을 악하게도 선하게도 만든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서 죽어가던 강도들은 똑같은 죄목으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형을 받아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의지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다. 하나는 낙원으로 갔고 하나는 멸망으로 갔다. 환경은 좋고 궂은 데가 없다. 우리가 처한 환경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다. 우리의 경주 장이요 전쟁터다. 승리한 사람들에게만은 아름다운 무대가 된다. 인류 역사 속에 빛을 남긴 위대한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젊은 날에 가슴에 꿈과 야망을 품은 사람들은 미래의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감으로 성공을 이뤄낸다. 물론 성공의 기준은 분명하다. 그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어떤 공헌을 했으며, 어떻게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대학교 전 총장은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부러워 어느 날 편지를 쓰기로 했다. ‘하나님 전 상서’ 라고 쓰고 “하나님 저는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 꼭 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00올림이라고 쓰고 편지 봉투에는 ‘하나님 귀하.’ 그렇게 썼다. 그런데 우체국에서는 그 편지를 하늘에다 날려 보낼 수도 없고 해서 교회에 목사님에게 갖다 줬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린이를 데려다가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신학대학을 가고 스위스에 유학을 마치고 대학에 교수가 되고, 몇 년 전에 총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정년퇴직을 됐다. 환경을 탓하겠는가.

불행을 딛고 훌륭하게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예는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의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그 역경은 그를 인류의 스승이 되게 할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하나의 미국을 만든 사람,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과 진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위대한 역경의 열매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생명을 건 모험과 인류를 위한 위대한 삶은 환경이 좋아서 해낸 일들이 아니었다.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성공한 사람들, 그들은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환경을 극복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사회가 환경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으로 인류를 위한 위대한 가치관을 갖고 미래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특별히 오늘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러한 꿈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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