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여자 한 분이 남편과 함께 창업상담 차 찾아왔다. 금융회사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명예퇴직을 한 남편이 1년 이상 쉬고 있으니 창업 아이템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대화도중 남편이 아내에게 “지금까지 내가 먹여 살렸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나 좀 먹여 살리지”라는 말을 했다. 순간 나는 멋쩍게 웃고 넘겼지만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걸 보고 장난삼아 한 말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먼저 나가고 나서 그 여성분에게 “내가 상담해 줄만한 내용이 아니니 차라리 취직을 하도록 유도해 보는 것이 어떠냐”며 조심스럽게 돌려보냈다. 예상대로 그 부부는 결국 창업을 하지 못하고 쉬운 방법(?)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통상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면 강하게 ‘부정’하게 된다. 그래도 그 현상이 계속되면 결국 ‘분노’를 느끼게 되고, 자신의 힘으로 한계를 느끼면 그땐 ‘협상’을 한다. 협상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고 우울증이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그 현상에 대해 ‘순응’하기에 이른다. 이를 도식화하면 ‘부정→분노→협상→우울증→순응’으로 나타난다. 그 남편도 역시 처음에는 그동안 자신의 업적을 무시한 명예퇴직 압력에 강한 부정을 했을 것이고 분노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세에 밀려 결국 협상의 과정을 거쳐 회사가 퇴직자에게 마련해 준 금융팀에서 일했고, 결국 자신을 버린 조직에 대한 원망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현실과 부딪혀서 승산이 없음을 안 다음에는 순응하게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응(順應).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순순히 응함’이다. 심리적 개념으로 보면 ‘어느 한 현상에 대해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순응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하려는 학생들 중에는 처음에는 열심히 모집정보도 찾고 이력서도 보내면서 열정적으로 도전한다. 그러다가 수십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 사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눈높이를 낮춰 재도전을 하게 되지만 그땐 이미 사회와 협상을 한 결과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자신을 학대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낮춰 인정해 버린다. 즉, 그 현상에 대해 순응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는 것에 익숙해지고, 핑계를 댈 수만 있다면 계속 놀고 싶어지는 심리가 생긴다. 이러한 현상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염치가 없어지고 결국 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까지 상담결과를 보면 졸업 후, 혹은 퇴직 후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6개월 이전에 찾지 못하면 ‘협상’의 수준에 이르고 1년이 경과하면 ‘순응’단계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 때쯤이면 원서도 무조건 내지 않고 이전보다 더 가려가면서 보내기도 하고, 의욕이 없어져서 어지간한 일에는 관심도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순응할 것을 강요받고 산다.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운전해야 하고, 시험이라는 순응과정을 통해 합격 여부를 판정 받는다. 그러나 사회나 자신에 대해서는 순응이 아닌 적응이 필요하다. 사회 환경에 적응하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욕구 충족을 위한 열정을 늘 가져야 할 것이다. 빈곤의 원인은 빈곤의 순응에 있다. 염치없는 거지보다 욕심 많은 노랑이가 그래도 더 나아 보이지 않는가. 2006년 한해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찾는 ‘욕심쟁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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