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빗장을 풀었다.

국보1호 숭례문이 100년만에야 비로소 문으로서의 역할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일제의 무모하고 오만한 우리문화말살정책으로 우리 유형문화의 상징인 국보1호가 그간 수난을 겪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무관심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간 너무 오래 우리는 문화자존심 1호를 방치해왔다.

서울은 요즘 복원바람으로 신바람이 나있다. 청계천 물길이 다시 열리고 숭례문이 열리고….

이제는 우리 청주 차례이다.

신라가 이 땅 서원에 석축으로 읍성을 쌓은 것은 신문왕9년 서기 689년이었다. 둘레 5543척(1.7㎞)에는 북문(현무문)을 비롯해 사대문이 번듯한 아담하고 아름다운 성곽이었다.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1915년까지도 읍성은 남아 있었다.

숭례문 같은 주문인 청남문도 그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지금의 청주약국자리이다.

사진으로 보는 청남문은 아취형 석축위로 팔짝지붕 솟아오르고 큰 기둥아래 난간에는 읍내 백성들이 점점이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이다.

청주 읍성의 해체는 도시 근대화라는 그럴싸한 미명아래 저질러진 만행인데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 승병에게 패퇴한 앙갚음의 심리가 다분히 작용 한 듯하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은 청주 성을 차지하고 주둔했으나 의병장 조헌 선생, 승병장 영규대사 등에 의해 패퇴, 청주성을 다시 내주었는데 우리측으로 보면 청주성 탈환은 임란최초의 승전이다. 이처럼 청주의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 주었던 청주 읍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석교는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돌다리.

남석교는 화강암을 이층으로 깔아만든 돌다리이다.

마치 대청마루를 놓듯 돌의 널빤지를 정방향으로 다듬어 양편을 이었다.

‘청주연혁지’를 보면 남석교는 한나라 선제 오봉원년에 건립됐다고 적고 있는데 이 연대는 놀랍게도 신라 박혁거세 즉위 원년인 BC 57년에 해당한다. 그 정교하고 아름다운 돌다리가 그간 몇 차례 큰 홍수로 인해 물길이 바뀌고 무심천 제방을 다시 쌓고 하면서 방치되면서 흙 속에 묻히다가 1932년에 이르러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큰 보물 중 하나가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저 깜깜한 지하로 매몰된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는 그 아름답던 돌다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주민들이 많다. 천년 고도 청주의 정체성 운운할 때 이곳 사람들은 제일먼저 청주읍성과 남석교를 떠올린다.

우리가 읍성과 남석교를 건너뛰어 청주의 문화를 얘기 할 수 없음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청주 읍성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은 어려우니 청남문 이라도 그 자리에 여법하게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부분적이라도 석곽을 쌓아 성터를 상징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청계천 복원하듯 작은 물길이라도 만들어 지하에서 신음하는 저 남석교도 서둘러 끌어 내야한다.

이일은 정말 요원 한 것인가.

내가보기엔 어쩌면 이일이 우회도로 한 줄기 만드는 일 보다, 무심천 종합 공원화 사업하는 일보다 훨씬더 중요하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