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밝이술을 마셨다.
정월대보름은 여전히 시골의 큰 명절이다.

이른 아침부터 귀밝이술 마실꾼들이 몇 몇 찾아왔다.
곧 마을회관에서는 부녀회 주관 윷놀이대회가 열린다는 ‘이장님 말씀’이 방 안 유선 스피커를 통해 웅웅 울려 퍼진다.

어머니는 지난 설에 쓰다 남은 정종을 따뜻하게 데워 내 오신다. 나도 덩달아 음복하듯 몇 잔을 빈속에 얻어 마셨다.
얼큰 해장술에 달아오른 촌로들은 충청도 특유의 억양으로 정부의 농정실패를 안주 삼아 큰 목소리로 입에 올린다.

예전 같으면 이제 곧 고된 농사일로 접어드는 때라 죽어라 일 할 일이 보름 끝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무엇을 심어 저 빈 밭을 채워야하나 하는 걱정으로 정월대보름 끝이 이렇듯 어수선하다.

마지막 보루였던 논농사도 그렇게 가고 과수도 축산도 밭작물도 신통치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작물이 없다. 풍년기근이라는 말이 있듯이 풍년이 들면 산지 농산물 값은 곤두박질이어서 인건비는 고사하고 재료비 건지기도 힘든게 대체로 본 우리나라 농사의 현주소이다.

어쩌다 우리 농사가 이리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 보름달은 유난히 크고 밝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나도 몇 가지 소원을 담아본다.
우선 올해는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지 않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

평생 농사밖에 모르는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한 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농부들이 열심히 일 한만큼 농사지은 것만큼만 제값 받고 내놓는 그래서 안심하고 편안히 농사짓는 그런 세상이 다시 왔으면 정말 좋겠다.

아울러 비정규직의 족쇄가 사라지는 원년의 해가 됐으면 좋겠다.
똑같이 일하면서도 엄청난 임금의 차이와 고용불안의 고통에 남몰래 눈물짓는, 현대판 노예제도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는 이 비정규직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 됐으면 한다.

그리고 덧붙여 한가지만 더 바란다면 제발 새해부터는 고질적 망국병인 그 편 가르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양극화에서 또 양극화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세포 분열하듯 분열과 분열을 거듭하는 그 편 가르기 병이 정말 사라졌으면 한다.
몇 년 전 대통령 취임식 때 뉴스에서 본 한 민초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말했다.
“상식이 통하는 시대가 되길 기대한다.” 그것은 곧 때때로 상식이 통하지 않은 시대였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민초의 기대대로 이 땅은 지금 상식이 원만히 통하는 그런 시대로 잘 흘러왔을까.
오늘밤에도 둥글고 큰 보름달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어제 보름밤 소원을 빌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전해오는 얘기처럼 저 달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무슨 소원을 빌까.
우리 모두의 소원이 한가지씩이라도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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